내 탓이 아니라니까
아무리 일찍 수주를 받아도 앞에서 일정을 다 까먹으면 뒷사람들은 죽어난다. 그런 면에서는 나는 마지막에 서 있다. 납품이 며칠이 남지도 않았는데 끊임없이 무언가를 덧대고 수정한다. 나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억지로 돌리며 뼈다귀 몇 개 만들고 고객사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사고 친 이는 다른 부서로 도망갔다. 아니 가서 다행이다. 그대로 있었으면 속 터졌으리라. 고객은 언성을 높이지만 화살은 늘 나를 비껴간다.
"팀장님이 다 짊어지셔야 할 거 같네요."
"팀장님만 믿을게요"
라는 담당자의 말은 오히려 젠틀하게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의 제품은 엉망진창이었다. 담당자도 진범은 놓치고 잔당만 닦달하는 꼴임을 느끼는 것 같다.
다른 곳이었다면 밤샘, 교대 근무가 나왔을 법한 상황이었지만 담당자는 늘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죠"라며 퇴근을 시켜줬다. 장기전이 될 거라는 걸 느꼈을 것이다. 더불어 요즘은 협력사만 홀로 회사에 둘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도 한 번도 먼저 가야 한다고 얘기하진 않았다. 누군가는 꼭 남아 담당자가 먼저 가자고 할 때까지 열심히 했다.
제품이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태는 의지의 문제다. 그리고 이것은 감정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걸 안다. 어떤 순간이 와도 근태로 욕을 먹어서는 안 된다. 최선을 다하고 있고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회사의 잘못이 커서 내가 고생하고 있지만 그것이 내 탓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어쩔 수 없다. 담당자가 미안해할 만큼 열심히 해야 한다.
"좀 빨리 좀 붙어주시지"
담당자는 그 정도의 말로 아쉬움을 토로한다. 제품이 이 모양이 된 것이 이 사람의 탓은 아니구나라고 인정하는 말이다. 여전히 힘들지만 고객과의 연결고리가 비로소 생긴다. 그래도 끝까지 증명해야 한다. 잘 될 때까지 말이다. 고객의 감정이 틀어지는 순간 힘든 건 바로 나니까.
"이제는 주말엔 쉽시다"
최근 담당자의 표정은 나쁘지 않다. 프로젝트의 불을 끄러 투입된 지 다섯 달째, 고객사에 들어온 지 석 달째 처음으로 토요일에 쉬자는 얘기가 나왔다.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이렇게 또 엉망진창인 프로젝트가 내 탓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냈다.
사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죄는 없지만 회사가 지은 죄가 많아 어쩔 수 없었을 뿐이다. 그저 잘 따라와 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