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해외여행지는 무려 유럽이었다. 군복무를 마친 후 몇 개월이 지난 후에 떠나는 거였지만 군대 가기 전까지 꼽아보면 꽤 오랜 시간 꿈꾸었던 여행이었는데 그때를 돌아볼 때마다 아직도 그날의 풋풋했던 내 젊음이 고스란히 떠올라 아직도 내 자신한테도 부러울 뿐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해외여행이라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가는 것이어서 아예 가족이민이거나 해외주재원, 운동선수, 연예인 정도만이 지인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면서 다녀오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다가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대국민 유화책으로 여러가지 자유화 조치(그때까지 시행되었던 말도 안 되는 금지령들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통행금지 시간 같은 것)를 시행하면서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도 그것에 포함되어 그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해외여행 붐이 일었다.(어느나라 사람이냐는 질문 후에 반드시 따라오는 질문북한사람이냐 남한사람이냐.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북한의 일반인은 결코 외국을 방문할 수 없어. 외교관이거나 운동선수이거나 몇몇 특정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만이 나올 수 있지.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가 그랬다는 것 아닌가. 끔찍할 뿐이다.)
그 당시 대학생을 위시한 젊은이들에게 유럽배낭여행이 인기를 끌었다. 나 역시 그 유행에 동승하여 지리적으로는 대륙의 끄트머리에 붙어있지만 지정학적으로는 일본과 다를 바 없는 섬나라인 대한민국에서 유럽대륙으로 점프했다.
그때 처음으로 영화나 TV가 아닌 내가 직접 몸으로 경험한 서양문화는 아니 정확히 말해서 유럽문화는 무척 여유롭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타이트한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였다.
어떤 순간엔 의도치 않게 사적으로 깊숙이 그들의 생활문화를 경험할 기회도 있었는데 유럽 선진국(그때만 해도 유럽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선진국이었다.)의 사람들은 그들의 안락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자율적으로 지켜야 할 것, 하면 안 되는 것 등이 아예 몸에 입력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행복하자고 저렇게 사는 걸 텐데 모든 것이 규칙과 규범으로 둘러싸여 산다면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들의 철저한 시민의식이 그때의 한국청년의 의식으로는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게 느꼈던 것 같다.
그 외의 것들은 그 당시 한국의 수준이나 유럽의 수준이나 별다르게 차이 나는 것은 없었다.(하지만 아침에 대도시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후미진 보도블럭에 쭈그리고 앉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팔뚝에 주사기를 꽂아 넣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이후 한국어교육을 위한 공부를 할 적에 잠깐 동안 미국 소도시에 방문하여 그들의 문화를 대충 훑어본 것이 서양문화에 대한 직접적 인식의 전부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그 풋풋한 이상주의자였던 청년은 이젠 엄마와 떨어진 아이 둘의 아빠가 되어 이 아이들을 데리고 유럽과 같은 서양문화권인 심지어 선진국에서도 손가락 안에 든다는 캐나다로 두 번째 삶을 살기 위해 오고야 말았다. 내가 경험했던 그때의 유럽 사람들의 규범적인 삶의 방식이 그들의 후손이 살고 있는 여기 북미 캐나다라면 심지어 영국의 연방 중 하나로 아직도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라면 (물론 꽤 세월은 지났지만 그들의 문화와 생활방식이 어디 갔겠나.) 여전히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도착했다.오... 확실히 다운타운의 구조나 건물의 분위기부터 유럽을 빼닮았다. 특히 런던에서 느꼈던 숲 속에다가 집과 건물들을 얹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외양은 그렇다 쳤는데 삶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 첫날부터 꽤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다고 해야 되나 할만한 이렇게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모르겠는 정도의 것들이 어쩔 수 없는 한국 아저씨에게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첫째, 한 달 동안 묵었던 한국인이 운영하던 임시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그곳 관리인이 처음 내민 것은 열쇠 꾸러미였다. 현관문하고 우리가 묵는 방 두 개의 열쇠였다.
"열쇠...를 사용하나요? 도어락을 사용하지 않으시나 봐요?"
"네. 여기는 아직도 대부분 열쇠를 사용해요. 도어락을 쓰면 열쇠 가공업자가 일이 없어진대요."
엥, 이게 무슨 말인가? 열쇠 가공업자의 일을 확보해 주려고 도어락 사용을 안 한다고? 근데 실제로 도어락을 팔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못 봤다. 일반 주택이든 아파트든 사무실이든 다들 열쇠 꾸러미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건물 현관에서 한 번 자기 사무실이나 집 현관문에서 한번 최소한 이렇게 두 번은 열쇠를 사용한다.(그래도 자동차 열쇠는 아주 옛날 차가 아니면 메이커에서 받은 최신식 스마트 키를 가지고 다닌다.)
처음에 우리 아이들은 열쇠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랐다. 아니, 이런 바보들이 있나 열쇠를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다니. 어이없어 하는데 이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언제나 도어락만을 썼지 열쇠를 열고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이거 뭐 연탄을 본 적이 없는 아이들 같은 이야기인가? 왜 도어락을 사용하지 않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들을 비롯해 열쇠는 정말 자주 잃어버리는 물건이라 한국에서는 도어락은 당연한 비품 중에 하나인데 여기는 왜 사용을 안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열쇠 가공업자를 위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큰 마트마다 열쇠를 복사하는 자동판매기가 하나씩 설치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둘째, 버스 운행시간이 버스회사 맘대로이다.
내가 살고 있는 위니펙이라는 도시는 밴쿠버나 토론토 같은 대도시가 아니어서 대중교통수단은 시내버스와 택시 밖에 없다. 거기다 버스 노선 당 약 이십 분 정도의 배차간격이라 버스를 기다리려면 꽤 강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런데 잘 오던 버스가 갑자기 노선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잦다. 이유는 모른다. 대중교통 앱에서 갑자기 "Not in service"라고 뜬다. 그러면 지금까지 약 이십 분을 기다렸던 게 허사가 되고 다시 이십 분 이상을 기다려야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래서 학교를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전화가 올 때가 있다. 버스가 갑자기 안 온다고 학교까지 차로 데려다 달라고.
갑자기 버스가 고장이 나서도 아닌 것 같은 게 "Not in service"라고 버스 이마에 전광판으로 켜고 다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한국이라면 사고가 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설사 그렇더라도 대체버스를 빨리 투입하든가 뒤에 오는 버스 간격이 길지 않아 그렇게 불편함은 없는데 여긴 그런 거 없다. 아마 주 교통수단이 대중교통이 아니고 개인차량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주로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대학생들, 아직 차를 사지 못한 이민자, 다운타운에 직장이 있어서 자기 차를 가져와서 주차하기는 부담스러운 직장인 들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아마도 이용자들이 항의를 안 해서 그런 것 같다. 심지어 어느 해는 버스요금을 한꺼번에 엄청 올렸는데도 이용자들이 항의를 한다는 소리는 들어보지를 못했다.
거기에 버스회사는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공공기관이라 서비스 면에서는 영 꽝이다. 하지만 버스기사들은 무척 인자하다. 어쩌다 버스카드에(여긴 플라스틱 버스카드가 아직 대중적이고 심지어 버스카드 도입시기도 7년 정도밖에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충전금액이 모자랄 때도 그냥 태워주고, 환승가능시간인 한 시간 삼십 분이 지나도 사정 설명하면 그냥 태워주고, 인심이 야박하진 않다. 대신 버스기사가 운행하다 말고 갑자기 화장실에 다녀온다든지, 맥도날드에 세워서 커피 한 잔을 사 온다든지 이건 뭐 시골버스도 아니고 아무튼 이렇게 약간 황당하고 때론 재미있는 일들이 가끔 벌어질 때도 있다.
셋째, 뭘 해도 기대를 저버린다.
놀이문화가 아주 대표적이다. 캐나다에 온 첫 해 12월 31일이었다. 위니펙의 대표적 명소 Forks라는 곳에서 성대한 불꽃놀이를 벌인다고 한참 전부터 광고를 해서 우리 세 식구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영하 35도의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을 찾아갔다. 주차티켓을 끊는 약 일분 간의 시간에도 손가락에 동상이 걸릴 수도 있겠다라는 공포감을 느끼면서 사람들과 함께 밀려밀려 꽁꽁 언 강가에 만들어진 행사장 앞까지 걸어갔다.
마침 그 해는 캐나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150주년이 되는 해라서 연말까지 자주 행사가 열리곤 했다. 그래서 올 해의 신년 행사가 더욱 기다려지는 때였다. 야외무대에는 이 날만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연습했을 것 같은데 이상스럽게도 약간 촌스러워 보이는 악단의 연주에 맞춰서 열정만 가득해 보이는 댄스팀들의 공연도 이어졌고 관객들의 예의에 찬 박수도 간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추위에도 이렇게 열심히 자리를 빛내주고 있는 그들을 위해 경의를 표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드디어 12시가 가까워지면서 사회자의 카운트다운도 시작되었다. 그곳에 모인 관객들도 슬슬 환호성을 올리기 시작했다. 우리 세 남자도 기대에 가득 차서 불꽃을 쏘아 올릴 행사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5,4,3,2,1!! Happy New Year!!!"
한없이 고조된 사회자의 카운트 다운과 관객들의 함성소리가 새해의 시작을 알리고 그 기쁨을 더욱 고조시킬 불꽃을 쏘아 올렸....을텐데 보이지가 않는다. 웬일인지 폭죽소리만 들리고 불꽃이 보이지를 않는다. 뭐 이 강가엔 높은 건물도 없어서 불꽃이 가려질 리도 없는데 노랗고 빨갛고 파래야 할 불꽃이 없다? 사람들은 저쪽 행사장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도 성대한 불꽃놀이를 보고 싶을 테니 그곳으로 걸어갈 테고 우리도 따라갔다. 사람들에 가려져서 행사장도 잘 안 보였고 아마도 그래서 불꽃이 안 보이는 건가?
"쉬~~~익! 펑!"
불꽃 쏘는 소리는 계속 들리는데 불꽃은 안 보이는 무슨 이런 요상한 일이? 꽉 들어찬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서 행사장 앞쪽까지 가자 드디어 약 이층높이의 가설무대가 보였고 그곳에서 불꽃이 쏘아 올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하... 불꽃은 아무리 높게 봐줘도 육층 높이를 안 넘었다.(아... 그러니 사람들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거지.) 불꽃의 크기는 조금 과장을 보태면 한여름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터뜨리는 폭죽 열 개 모아놓은 크기 정도? 불꽃의 화려함은? 에휴... 그만하자.
영하 35도를 무릅쓰고, 손가락에 동상이 걸릴 뻔 해도, 파카모자로 얼굴을 꽁꽁 싸매고 이렇게 찾아왔는데 와... 이거 너무하지 않는가? 여기가 대도시가 아니라 규모가 작은 중소도시라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여의도 불꽃축제는 고사하고 우리 동네 노래자랑 불꽃놀이도 그 불꽃이 하늘을 덮는다.
우리 옆에 앞에 가족들 연인들은 뭐가 좋은지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너네는 뭐냐? 너넨 이게 진짜 불꽃놀이라고 생각하니? 그 뒤로도 무슨 기념일마다 불꽃놀이는 한다. 아니 아마 하는 것 같다. 쿵쿵 폭죽 터지는 소리는 들리는데 그 넓은 하늘에서 민들레 홀씨만 한 불꽃 한 번 본 적이 없다. 이 사람들은 그래도 불만이 없다.
요런 식의 기상천외한 일들은 열 번째도 넘게 풀어낼 수 있다. 이보다 더 기상천외한 건 이 사람들은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하게 이 시간을 즐긴다는 것이다. 심지어 돈을 내고 보는 공연도 이렇게 허접할 데가 없다. 그런데 이러쿵 저러쿵 불만스러워하는 사람들은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 뿐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우리가 너무나 좋은 곳에서 살았었고 너무나 좋고 훌륭한 것만 보고 살고 너무도 편리하게만 경험해서 눈이 엄청 높아있구나 이것이다. 그런 것만 누리며 살았지 그런 최고의 것만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영혼까지 갈아 넣는 그들의 수고는 당연한 거라 여겼던 것 같다. 이곳은 그럴 리는 없기 때문에 모든 게 부실하고 느리고 어이없기도 황당하기도 심지어는 뻔뻔해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아 보인다.(지인이 캐네디언 남자와 결혼하여 한동안 한국에서 같이 살다가 캐나다로 오게 되었는데 느려터진 공공기관의 일처리를 보고 부아가 치민 남편이 한국 같으면 십 분이면 완벽하게 끝낸다고 담당자에게 쏘아붙였다고 해서 한참 웃었다.)
처음엔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했었는데 저번에도 한 번 한 이야기지만 나 자신도 이젠 한국처럼 완벽하고 훌륭한 일처리와 퍼포먼스가 과연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건 마치 남미나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되는 커피를 비롯한 많은 상품들이 그곳 노동자들의 터무니없이 싼 노동력으로 저렴하게 수입되는것이어서 그들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는 상품을 구입해야 한다는 '공정무역'의 이야기와 비슷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너무나도 훌륭한 재화와 용역을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누려오지 않았나 생각해 볼 일이다. 형편없는 비용을 지불하면서 말이다.(여긴 반대로 형편없는 재화와 용역을 너무나 많은 비용을 지불하며 사는 것 같다.ㅋㅋ)
오늘은 아무래도 누워서 침을 엄청 뱉게 될 것 같아서 얼굴이 뜨뜻할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조금 만회를 한 듯하다. 그래도 여기 브런치의 제목처럼 '난 뭐 누가 뭐래도 캐나다가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