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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모카봉봉 Jun 20. 2020

[그림책] 누군가를 위한 삶이 아닌 나를 위한 삶

100만 번 산 고양이(사노 요고 글. 그림)



오래된 스테디셀러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에서

첫 번째 조건으로 자기 주도적 삶을 성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꼽았습니다.

자기 주도적 삶이란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은 결정권을 가진 사람으로

타인이나 환경, 조직에 의존하거나 구속되지 않고

자율적으로 삶을 결정합니다.

학습 방법, 직업 선택, 결혼 등 인생의 대소사를 내 의지대로 결정합니다.



이런 정의의 삶이 자기 주도적 삶이라면

자기 주도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자기 주도적인 삶을 원하다가도

어려운 순간에 있어서는 선택을 미루고, 다른 사람에게 선택을 넘기고

상황에 따라서는 사람들 속에서 존재를 감추기만 바쁩니다.



어쩌면 의존적인 삶이 편할 수도 있을 텐데

왜 자기 주도적인 삶이 중요

한 것일까요?


자기 주도적인 삶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먼저 생각나는 책이

바로 사노 요코의『100만 번 산 고양이』입니다.










백만 년이나 죽지 않는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백만 번이나 죽고 백만 번이나 살았던 것이죠.

백만 명의 사람이 이 고양이를 귀여워하고,
백만 명의 사람이 이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었습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는 한때 임금님의 고양이이기도 하고,
한때는 뱃사공의 고양이이기도 하고,
한때는 서커스단 마술사의 고양이이기도 하고,
도둑, 할머니, 어린아이의 고양이 이기도 했습니다.
참 다양한 삶을 살았던 것이죠.

그리고 한 때는 고양이는 누구의 고양이도 아니었습니다.
도둑고양이였던 것이죠.
고양이는 처음으로 자기만의 고양이가 되고 자기를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다른 고양이들이 다가와 애정을 표현하면
나는 백만 번이나 죽어 봤다고 이야기하며 자기 자신만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양이는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사랑에 빠지게 한 하양 고양이와 함께 있게 되고
귀여운 새끼 고양이도 많이 낳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난, 백만 번이나....."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얀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할 정도였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와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얀 고양이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음을 터트립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도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얀 고양이 곁에서 함께 눈을 감습니다.

고양이는 예전처럼 다시 태어날까요?
고양이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해서 100만 번이 살아온 고양이

늘 나는 100만 번이나 살아봤다며 자랑을 합니다.

사실 100만 번이라는 숫자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왜일까요?

100번이나 살았지만 고양이 스스로의 삶을 산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100만 번이라는 숫자는 의미가 없었던 것이죠.

결국 마지막에 자기만의 삶을 살고 난 후에야 다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군가의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고양이가 많은 삶을 사는 것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누군가의 고양이라고 소개합니다.

임금님의 고양이, 뱃사공의 고양이, 서커스단 마술사의 고양이...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소개가 낯설지 않습니다.

아마 나도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소개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겠죠.


OO이 엄마, OO의 아내, OO의 딸, OO의 직원

OO이 아빠, OO의 남편, OO의 아들, OO의 직원


나를 알려주는 내 이름이 존재하는데

왜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설명이 되어야 하는 걸까요?

인생을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오늘도 누구를 위한 하루를 살지는 않으셨나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이들을 위해 계란 프라이와 스팸으로 아침을 먹인 후

등원을 시키고 집에 돌아와 저녁에 들어올 신랑을 위한 반찬들을 해놓고 청소를 하는 중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주 내내 이런 일정이 반복이었구나', '나를 위한 시간을 갖지 못했구나'

그래서 오늘은 미루고 미루었던 염색을 드디어 했습니다.

몇 달 만에 나를 위해 머리를 다듬고 염색을 하니 어쩜 이리도 좋을까요.



사소한 나를 위한 행동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삶이 누군가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나를 위한 삶이라면 얼마나 재미있고 의미 있을까요?






우리의 인생은 희로애락의 연속이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선택하고 살아갈 때

물론 실패할 수도 있고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노여움과 슬픔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쁨, 즐거움과 함께 노여움과 슬픔도 있어야 인생 아닐까요?




고양이는 자신이 사랑하던 하얀 고양이가 죽자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그림만 봐도 고양이가 얼마나 슬프고 힘든지 느껴집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누군가의 고양이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기쁨도 느끼고, 사랑도 느끼고, 슬픔도 느끼며

삶다운 삶을 경험했기에 다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사오십의 나이가 되어서도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제대로 정하지 못해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한 사람은 별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하루라도 빨리 내 삶의 결정권을 회복하고 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남들이 그려주는 지도가 아니라 남을 위한 지도가 아니라

나 스스로 그린 마음의 지도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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