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흐름으로 개도국 이해하기
오늘날 우리가 논하는 국가 간 빈부 격차, 즉 부유한 '선진국'과 가난한 '후진국'의 격차는 산업혁명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혁명은 18세기 후반(1760년대 ~ 1800년) 영국에서 시작되어 19세기에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동력원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1776년은 산업혁명의 중요한 기점으로 꼽힙니다.
이 혁명으로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서구 열강들은 원료 공급지와 상품 판매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식민지 쟁탈에 나섰고, 19세기 후반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지에 대한 식민지화가 극에 달했습니다.
이 시대의 경제 사상은 고전적 자유주의(18세기 ~ 1930년대 초)가 지배했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표되는 이 사상은 "정부는 시장에 개입하지 말고 민간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에 맡겨야 한다(자유방임주의)"는 믿음 아래 산업혁명 시기 자본주의의 폭발적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한편, 바로 이 시기(1776년 7월 4일)에 독립을 선언한 미국은 19세기 내내 광활한 영토, 풍부한 자원, 이민자를 통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유럽을 뒤쫓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둔 결과, 극심한 빈부격차와 주기적인 공황이 발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갈등은 임계점에 달했습니다.
영국, 프랑스 등 기존 강대국과 독일 등 신흥 강대국이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고, 유럽 대륙은 '삼국 동맹(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과 '삼국 협상(영국, 프랑스, 러시아)'으로 나뉘어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을 이어갔습니다.
결국 이 갈등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폭발했습니다. 전쟁 후, 고전적 자유주의의 모순은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정점을 찍었고, '보이지 않는 손'이 만능이 아님이 증명되면서 그 힘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대공황의 혼란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발발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 질서는 완전히 재편되었습니다.
1940년대 ~ 1970년대,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대공황의 해법으로 제시했습니다.
"시장이 불안정할 때는 정부가 세금을 걷고 공공사업을 일으키는 등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유효수요를 창출하고 경제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브레튼 우즈 체제가 바로 이 케인스주의에 기반한 전후 세계 경제 질서입니다.
유럽의 주요국들이 모두 폐허가 된 반면, 미국 본토는 피해 없이 전쟁 물자를 판매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이로써 미국은 '부강한 나라'에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올라섰습니다.
영국, 프랑스 등 기존 제국주의 열강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식민지 국가들 사이에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커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수많은 국가가 독립을 이루는 '탈식민화(Decolonization)' 시대가 열렸습니다.
전쟁은 1945년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승전의 핵심 축이었던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각각 자유민주주의 진영(제1세계)과 공산주의 진영(제2세계)이 형성되며 냉전(Cold War)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의 참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1945년 10월 24일, UN(국제연합)이 공식 출범했습니다. 또한 미국은 1948년부터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통해 서유럽의 경제 재건을 지원했는데, 이는 유럽 시장을 확보하는 동시에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으려는 냉전 전략의 일환이었습니다.
냉전 구도 속에서,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신생국들은 미국이나 소련 어느 한쪽에 편입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들은 강대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연대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제3세계' 또는 '비동맹 운동'의 시작입니다. 1955년 반둥 회의가 그 역사적인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독립에도 불구하고 이들 개발도상국은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식민지 시절 이들 국가는 본국에 원자재(고무, 설탕, 원유 등)를 싸게 공급하는 역할만 하도록 경제 구조가 짜였습니다. 독립 후에도 이 구조를 바꾸기 어려워 선진국에 경제적으로 계속 종속되었습니다. 이를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라고 합니다.
② 서구 열강들이 아프리카나 중동의 국경선을 그을 때, 민족이나 종교를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그었습니다. 이 때문에 독립 후에 수많은 내전과 분쟁이 발생하여 발전에 힘을 쏟을 수 없었습니다.
③ 교육받은 인재나 행정 시스템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독립을 맞아 국가 운영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제3세계 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원조를 해주기도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정권은 쿠데타를 사주하여 전복시키는 등 끊임없이 내정에 간섭하여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켰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3세계 국가들은 케인스주의("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사상)에 기반한 전후 세계 경제 질서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1964년, 77그룹(G77)을 결성하여 UN을 무대로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NIEO) 수립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서구 선진국 중심의 경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매우 급진적인 주장이었습니다. ① 원자재 가격 안정(자신들이 파는 원자재 값을 제대로 받게 해달라), ② 선진국의 기술 이전, ③ 선진국 시장에 대한 우대적인 접근(관세 혜택 등)과 같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세계 경제 규칙을 다시 만들자고 요구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라틴 아메리카의 '종속 이론'에 이론적 기반을 두었습니다.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부자 나라가 만든 착취적 구조 때문"이라는 이 이론은 NIEO의 정당성을 뒷받침했습니다.
그러나 NIEO를 향한 제3세계 개발도상국들의 열망은 1980년대에 완전히 좌절되고, 오히려 정반대인 '신자유주의' 질서에 편입되고 맙니다.
"도대체 1970년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과거에는 각국 화폐의 가치가 '금'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금 1온스 = 35달러'로 정해두고, 다른 나라가 달러를 가져오면 언제든 금으로 바꿔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는 미국 정부가 보유한 금의 양만큼만 달러를 찍어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1971년 미국이 이 약속, 즉 금 본위제(Gold Standard)를 폐기했습니다. 이제 미국은 금 보유량과 상관없이 달러를 마음껏 찍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풀린 돈은 시중 은행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미국이 금 본위제를 폐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1950년대와 60년대의 산업 발전때문입니다.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하며 상품의 생산성을 극대화합니다.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해 노동을 분업화하여 생산 효율을 극대화하자 상품은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금 본위제 때문에 시중에 돈(통화량)이 충분히 풀리지 않아 사람들이 그 물건들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즉, 공급은 넘치는데 수요(돈)가 부족한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시장은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했습니다.
두번째는 베트남 전쟁(Vietnam War)입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이 전쟁은 미국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장기화되었습니다. 전쟁에는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금 본위제하에서는 돈을 마음대로 찍어낼 수 없어 전비를 충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미국은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금과의 연결 고리를 끊고 달러를 찍어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오일 쇼크(oil shock)입니다. 1973년, 1979년,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 가격을 4배 이상 대폭 인상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들은 석유를 팔아 엄청난 양의 달러(오일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이들은 갑자기 불어난 돈을 자국 금융 시스템에서 다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뉴욕, 런던 등 서구의 대형 은행에 예금했습니다. 이로 인해 서구 은행들은 다시 한번 막대한 달러 자금을 보유하게 됩니다.
은행은 쌓여있는 달러를 그냥 두면 이윤이 나지 않으므로, 어떻게든 대출을 해줘야 했습니다. 돈이 넘쳐나니 매우 낮은 이자율이라는 좋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개발도상국들은 석유를 수입해야 했기에 오일 쇼크로 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고, 발전을 위한 자금도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낮은 이자(변동금리 조건)로 쉽게 돈을 빌릴 수 있는 상황에서, 돈이 급했던 개발도상국들은 앞다투어 서구 은행들로부터 막대한 빚을 지게 된 것입니다.
1980년대 초, 미국이 자국의 높은 물가(인플레이션)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급격하게 올렸습니다. 이에 따라 변동금리로 돈을 빌렸던 개발도상국들이 갚아야 할 이자가 하룻밤 사이에 몇 배로 뛰어올랐고, 더 이상 빚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배 째라" 식의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선언하기 시작했습니다.
멕시코를 시작으로 남미와 아프리카의 수많은 국가가 연달아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며, 전 세계적인 부채 위기가 터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강요받게 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됩니다.
이 위기는 채무국(개도국)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빚을 진 나라들이 줄줄이 채무 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면, 돈을 빌려준 거대 서구 은행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세계 금융 시스템 전체의 붕괴를 의미했습니다. 즉, 이것은 채권국(선진국과 은행)의 위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금융 기관들은 매우 빠르게 경각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재무부, IMF, 세계은행, 그리고 돈을 빌려준 민간 은행 대표들이 워싱턴 D.C.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라고 부릅니다. 이들의 주된 목표는 개발도상국을 돕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빌려준 돈을 회수하여 은행과 금융 시스템을 구제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빚을 갚을 수 있도록 추가 자금을 빌려주고 일부 빚을 탕감해 줄 테니, 그 대신 우리(IMF, 세계은행)가 요구하는 대로 너희 나라의 경제 체질을 바꿔라."
이들은 개발도상국을 향해 '구조조정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수익이 나는 수도, 전기, 통신, 철도 같은 국가 소유 기업(공기업)을 민영화하여 팔도록 하고, 외국 자본이 쉽게 들어와서 그 기업들을 살 수 있도록 규제를 풀라고 하며, 긴축 재정을 통해 정부 지출을 줄여서 빚 갚을 돈을 마련하도록 합니다.
개발도상국들은 공기업을 헐값에 외국 자본에 넘겨 마련한 돈으로 빚을 갚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핵심 자산이 외국으로 넘어갔고, 공공 서비스 요금이 급등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을 겪었습니다.
이것이 17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약 200여년간의 세계 흐름에 따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어떻게 발생했고 국가간 빈부격차가 생긴 이유를 간략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더 다양한 이유와 원인들이 있겠지만, 이렇게 대략적으로 살펴보며 세계를 이해하는 눈이 조금은 커진 것 같습니다.
추후에도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다른 콘텐츠도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