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유년시절로 인한 악순환을 끊는 시작
나는 나를 사랑한다. 분명 사랑하긴 한다. 근데 온전히 나의 존재 자체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죽고 싶었다. 서울대학교병원 간호사로 바쁘게 활동하다가 아이를 키우며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갔다. 밖을 나가는 일은 손에 꼽고, 시댁이나 친정이 없어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단독 육아를 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치다 결국 삶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재는 상담, 독서, 명상, 운동, 글쓰기의 힘으로 이제는 항상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이전의 삶과 비교하면 정말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아직 부족하다. 분명히 행복한데, 아직 우울한 마음이 가끔 올라온다.
분명 행복한데 왜 그런 기분이 드는 이유가 뭔지 고민해 본다. 우선 첫째로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공주에 있는 숲 유치원이 있었다. 스쿨버스가 있어 내가 살고 있는 세종에서도 보낼 수 있었고 숲 생태 활동을 하기에 이름도 '숲생태 유치원'이었다. 밥 먹는 시간 빼고 숲에서 거의 하루 종일 보내는 곳이었다. 농촌에 있고 옆에 계곡도 있고 산도 있어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아이들은 온종일 숲에서 뛰어놀았다. 첫째는 올해 그곳을 졸업했고 작년에 둘째도 들어갔다. 하지만 지금 둘 다 다니지 않는다. 유치원은 없어졌다.
유치원은 단지 행정적인 문제로 없어졌다. 다니고 있던 아이들, 아이를 보내고 있던 학부모, 아이들을 가르쳐주던 선생님 모두 만족하는 곳이었는데, 안타깝게 문을 닫게 되었다. 첫째를 졸업시켰으니 둘째도 졸업까지 마치게 하고 싶어 유치원이 지속될 수 있도록 교육청에 항의 방문도 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아마 그즈음부터인 것 같다. 내가 다시 심한 우울감을 느끼게 된 것이. 우리 아이가 다니고 있고 졸업까지 할 유치원이 사라졌다. 너무나도 만족해서 주변에 칭찬하며 홍보까지 한 그 유치원이......
우울한 마음이 드는 두 번째 이유는 첫 아이가 전원형 혁신학교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3년 전 세종에 이사 오면서 혁신 학교가 있는 곳을 먼저 찾고 그 옆에 집을 골랐을 정도로 아이를 혁신학교에 보내겠다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지금 집은 혁신학교 학군이 아니다. 3층인데 필로티고, 옆에 산이 있고, 도서관이 가깝고, 근처에 천변도 있고, 상권도 잘 형성되어 있어 다 마음에 드는데 혁신 학교 학군만 아니었다. 하지만 학교보다 가정에서 행복한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큰 결심을 하고 이사를 왔다. 나중에 알아보니 혁신 학교는 시골에 있는 학교를 보내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거기로 보내겠다고 다짐하며 아이가 8살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3년 동안 이미 그 학교 학부모라고 생각할 정도로 학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하지만 결국 추첨에서 떨어졌다.
다니고 있던 유치원이 사라지고, 보내고 싶던 학교에 떨어지는 일은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내가 우울감을 느끼고 있다. 역경을 많이 극복하고 회복 탄력성도 생겼지만, 아직은 힘들다. 왜 그럴까? 바로 우울한 세 번째 이유가 있다.
분명 예전과 다르고 행복해졌는데, 마음속으로는 공허하다. 어렸을 적 나는 부모님께 사랑을 받았다는 기억이 없다. 정말 없다. 혼나고, 맞고, 부모의 관심 없이 혼자 보냈던 기억만 가득하다. 부모님께 인정을 받은 적도 없다. 어렸을 적에 죽음을 자주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누가 슬퍼할까 생각하면 단 한 사람만 떠올랐다.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고 마음을 열었던 우리 가족인 내 여동생만 슬퍼할 것 같았다. 가족이지만 엄마도 아빠도 언니도 다 나를 싫어했다. 물론 우리 가족이 이상한 건 아니다. 알코올 중독도, 가정 불화도 없었다.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부모님은 부모님 방식대로 나를 사랑했겠지. 굶지 않도록 먹여주고 입혀주고 교육시켜 주셨다. 근데 그게 다다. 정서적인 지지, 따뜻함 이런 건 느낄 수 없었다. 내가 필요한 건 그것이었는데...... 그리고 내가 유별났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문제가 많았다. 게으르고 뺀질거리고 고집세고 말도 잘 안 들었다. 그래서 세 자매 중 유일하게 나만 부모님께 계속 맞았다. 언니는 엄마 아빠 말을 잘 들었고, 동생은 맞는 나를 보면서 맞는 것만은 피하자고 사회화가 되었다. 그래서 나만 맞았다.
부모님이 나를 아무 때나 때린 건 아니다. 엄마 아빠가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내 고집을 꺾게 할 방법은 때리는 거니까 그때 매를 들었다. 정해진 매는 없었다.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대로 맞았다. 파리채로 맞을 때는 많이 속상했다. 줄이 하나가 남는 게 아니라 파리채 손잡이 모양으로 짧은 여러 개의 평행선이 남았기 때문이다. 엄마를 위해 생일선물로 방 닦을 때 허리 아프지 말라고 사준 봉걸래로도 맞았다. 내가 맞는 것을 보며 우리 가족들은 "엄마 선물로 네 매를 사 왔네"라고 하며 비아냥 거렸다.
부모님 입장에서 내가 맞으면 말을 들으니까 때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한두 번 맞으면 고집을 피우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계속 고집을 피우다가 맞기를 반복했다. 부모님은 분명 나를 사랑하기는 사랑했겠지만,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느낄 새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는 언니도 싫어했다. 언니가 아끼는 옷을 입고 나가서 더럽히곤 했다. 언니는 다시는 자기 옷을 입지 말라고 했지만 계속 옷을 입고, 언니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고, 언니를 못살게 굴었더니, 언니도 날 싫어했다. 부모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내 속내를 털어놓고 말할 수 있고, 나를 위로해 주고, 나를 인정해 준 가족은 오직 내 여동생뿐이었다.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내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특히 부모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나는 그런 사랑의 절대치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서 나를 존재 그 자체로서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나를 인정하지도, 나를 칭찬하지도, 나를 격려하지도, 나를 믿지도 않는다. 오직 내가 하는 건 부모님이 나에게 보여줬던 것처럼 그것밖에 못하냐고 나를 혼내고 나를 채찍질하며 때리는 것뿐이다.
내면의 나를 치유하는 것을 덮어둔 채로 다른 행동을 하니 현재의 기분은 좋아진다. 하지만 그 근본인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지 못하니 별거 아닌 작은 일에도 쉽게 무너진다. 미라클 모닝을 몇 년째하고 있는데 아직 습관을 기르지도 못했다. 이것도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적 나를 사랑하지 않고 살아왔다. 애정결핍은 있어도 사회생활을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우울증도 없었다. 인생의 재미와 행복이 없었을 뿐 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지독한 산후 우울증, 육아 우울증으로 죽고 싶은 기분까지 들고 나서야 나를 찾고 나를 사랑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예전의 삶처럼, 아니 예전의 삶보다 더 행복한 삶을 현재 살고 있지만, 아직 나를 완전히 사랑하지 못하니 자꾸 우울감에 빠지는 일이 반복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정말로 온전히 나를 사랑하고 싶다.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