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과 중년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죽 하향세로 가다가 인생이 끝나는구나' 싶은데 딱히 끌어올리거나 뒤로 돌릴 방안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기력함과 절망과 우울의 삼종세트를 짊어지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면서 하루하루를 분망하게 살았다. 치열하게 사는 것과 분망 하게 사는 것은 다른데 난 분망 하게 살면서 치열하지 않은 것을 애써 덮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엔 약속이 없으면 허전하곤 했다. 이 친구, 저 친구를 만나면서 속마음을 주고받으며 위안받으려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내 속을 털어놔도 달라지지 않았다. 속마음을 털어내면 털어낼수록 오히려 더 텅 빈 느낌이었다.
그즈음 졸업한 대학 과사무실에 가게 됐다. 학교에 남은 동기에게 전해줄 것이 있어서다.
오랜만에 들른 과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대학 때 전공과목을 가르치신 교수님이 계셨다.
"오.....(한참 뚫어지게 쳐다보시다)이게 누구야. 예뻤던 아무도 아냐?"
".................. 아, 네 안녕하셨어요?"
그 이후 여러 근황을 물으셨고 난 다소곳이 대답했다. 교수님이 과사무실을 나가고 친구를 기다리는데,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둥둥 떠다녔다.
'예뻤던, 예뻤던..... 예뻤던? 예뻤던!'
'예쁜'도 아니고 '예뻤던' 은 뭔가? 과거 완료 아닌가? 과거 완료와 현재 완료의 차이는 현재 상태의 지속 여부인데. 지금은 안 예쁘다는 것을 저렇게 명확하게 선 그을 수도 있구나.
뭐, 사실 그 당시 아이 둘에, 직장에, 지칠 대로 지쳐서 나보고 예쁘다고 하면 더 가식이라고 느꼈을 때이긴 하다. 그럼에도, 굳이 과거와 현재를 극명하게 대조시키는 저 화법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예뻤던 아무도..... 뒤끝 있는 나는 '나도 한때 좋아했던 교수님이라고 할걸... '싶기도 했다.
39살의 우울의 나날은 가을에 들어서자 절정에 이르렀다.
39살의 난, 곧 닥쳐올 40대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검은색 멜라닌 색소가 빠져나간 중년의 희끗희끗한 흰머리.
완경을 맞이한 갱년기 여성의 모습에선 어떤 희망도 읽을 수 없는 줄 알았다.
늘 푸른 소나무가 불로 장생을 의미한다면 단풍나무는 일정 주기로 변하는 걸로 보아 인생의 단계 중 중년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을에 단풍과 낙엽을 보고 있으면 우울감의 농도는 짙어졌다.
단풍은 나무가 겨울을 견디기 위해 ‘낙엽 만들기’를 준비하면서 만들어진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나무는 나뭇잎으로 가는 영양분을 차단하게 된다. 그래서 나뭇잎에 들어 있던 엽록소는 양이 줄게 되고, 결국 나뭇잎의 녹색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대신 전에는 녹색의 엽록소 때문에 보이지 않던 다른 색의 색소가 더 두드러져 나뭇잎이 다양한 색(붉은색, 황색)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그 본연의 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나치게 두려워했던 것, 거기에 내 우울의 원인이 있었다.
그댱시 난 늙는다는 사실보다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려있었다.
그렇게 39살의 가을을, 단풍을 보며 어떤 희망도 의미도 느끼지 못한 채 흘려보냈다.
그 후로 십수 년이 흘렀다.
얼마 전, 친구와의 통화에서
"마스크를 오래 썼더니 얼굴에 팔자주름이 더 깊어졌어. 흰머리 염색도 이젠 한 달을 못 버틴다. 정말 우울해"
하는 말이 전해왔다.
"맞아. 우울해. 그런데 자꾸 거울을 들여다봐 뭐하겠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나이 듦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다. 즐거울 수는 없다. 친구와 이야기하면 서로 위안을 해주기 바쁘다.
아무리 낙엽이 불타오르듯 붉어도 꽃보다는 못하니까.
꽃은 자체로 빛나게 아름답다. 단독적으로 본 단풍은 꽃보다 아름답지는 않다. 가까이서 보면 주름진 얼굴 같기도 하다. 단풍의 시기가 오면 '나'를 파고드는 것에서 좀 벗어날 필요가 있다. 시야를 넓혀 본다.
애써 위안을 찾았다면,
멀리서 바라봤을 때, 꽃이 보이는 산은 없다. 꽃은 산에 묻혀 버린다.
멀리서 쳐다봤을 때, 단풍으로 색이 변한 산은 있다. 단풍은 산에 색을 입힐 수 있다.
단풍은 서로 모여서 산색을 붉게 물들이고 등산객의 발걸음을 재촉할 수 있다.
주변에 좀 더 파급력이 크다. 실제로 아이에 물드는 어른은 드물다. 반면 어른에 물드는 아이는 많다.
주변을 선한 영향력으로 아름답게 물들이는 것, 단풍과 중년의 공통점이었으면 한다.
단풍은 초록을 잃고 붉음이 드러났지만 그 붉음으로 산을 아름답게 만든다.
중년은 멜라닌 색소를 잃고 희끗희끗한 머리로 세상에 선한 기운을 퍼트린다.
어쩌면 단풍의 모습에 중년의 이상적 모습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좋은 일을 했을 때, 그 뿌듯함이 내 일의 성취감에 못지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소한 말 한마디, 환한 웃음이라도 상대방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며 나이 들고 싶다.
주변을 보면 청년기에 기쁨과 성취만 누린 사람보다는 슬픔과 실패와 고통을 느껴본 사람이 더 깊은 색을 지닌 것 같다.
기쁨으로만 색칠한 색은 고통과 함께 우려낸 색을 따라올 수 없다. 지금 당신이 고통받고 있다면 당신의 중년 단풍색을 더 붉게 만들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모든 고통이 의미가 있다는 말은 그저 위로를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님을
쉰 살이 넘어서야 알게 됐다.
다양한 경험, 그 안에서 실패와 성취를 맛보는 과정을 지나. 내 안의 이해의 폭이 점점 넓어지기를 바란다.
크로와상처럼 겹겹이 쌓인 내 인생 경험 안에 한 겹씩 닮아있는 타인의 모습을 보고 내 안을 펼쳐보며 동질감에 젖어들 수 있다면 이 또한, 나의 성장 이상의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
그다지 나쁘지 않다. 이제는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 후, 49살에는 50살이 되는 것이 두렵고 우울했냐면? 전혀!
정말 기쁜 마음으로 50살을 맞이했다. 10년간 내 마음의 변화가 나를 그렇게 이끈 것 같다.
다행이다.
"웰컴 투 오십 대"
<사진 출처: 픽사베이>
이 글은 21. 3월에 출간된 책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에 일부 수정돼 실려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출간 이야기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