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화가 많이 쌓인 채로 살았다.
많은 것들이 불합리해 보였지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그 무기력함은 화로 쌓여갔다.
화는 나의 모습을 왜곡한다. 상냥하던 표정은 엄숙하게 굳어지고 목소리는 격양된다. 매력적이지 않다. 열정이 차오르는 사람은 매력 있지만 화가 끌어 오르는 사람은 경계하게 된다.
표정 사진을 찍어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시절이 나의 불행 기였는지... 화로 응집된 나날에 찍은 사진은 억지미소가 그리 어색할 수 없다. 반면 화로부터 자유로운 나날엔 가만히 있어도 얼굴에 생기가 흐른다.
무표정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늘 투덜거리며 해야 할 것을 다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합리하다고 화를 쌓아가면서도 결국은 그 불합리함을 유지하고 있는 건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할 것을 다 하기 때문에 편리함을 누리는 상대방은 나한테 고마워 하기는커녕 나를 만날 화만 내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밑지는 장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다시 화가 난다.
그렇게 화에 지배돼 추한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던 어느 날,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며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정신과 의사가 나와 사연에 해당하는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사연이 나오는 라디오를 즐겨 듣지 않아서 다른 주파수를 맞추려는데 그날 사연의 주인공이 나와 상태가 비슷해 망설여졌다.
그 사연 주인공은 늘 화가 나서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고 했다. 특이한 것은 그렇게 화가 난다고 하면서 남편한테도 아이들한테도 주위 사람한테도 늘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흥미로웠다. 내가 보낸 사연인가? 싶을 정도로.
다행히 아이는 차 뒤에서 곤히 잠들었고 난 최대한 집중해서 들었다. 어떤 해답이 나올지 궁금했다.
" 너무 억울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좀 미안해하며 사는 게 나아요."
"................................................."
그렇다. 억울할 정도로 하면서 늘 분에 차 있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아니 때론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상대방에게 미안해하는 것. 그게 지금까지의 내 상황을 가장 잘 해결할 방법이었다.
억울함 보단 미안함 선택하기
보통 화로 가득 찬 내 주위의 사람들을 보면 너무 잘 참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기 싫어도 참고, 하지 않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 하고 나서 참고, 해야 할 말도 참고 만다. 그 결과는 화병이다.
70대 80대 할머니들을 만나면 여전히 50년 전 해묵은 시집살이 이야기를 하며 한을 풀어놓는 걸 볼 수 있다. 50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화.
이건 마치 우리가 화장실 변기에 화장실용 휴지를 넣고 내렸는데 막혀서 다시 보니 휴지가 아닌 비닐봉지였던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화장실 변기에 용해돼 내려갈 수 있는 것과 절대 용해될 수 없는 걸 분별해야 하듯이
그냥 넘길 수 있는 화와 꼭 해결해야 할 화를 구별해야 한다.
비닐봉지인데 그걸 화장지인 줄 알고 변기 플러쉬를 내려버린다면 변기는 막힌다. 마찬가지로 해결해야 할 화를 그냥 넘겨버리면 그 화는 가슴에 체증으로 남는다.
해결할 수 없는 화에 이르기 전에 생활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참고하는 것'에서 '참지 않고 안 하는 것'으로.
미안해하며 그동안의 억울함을 푸는 것. 쉽지 않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