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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Feb 06. 2021

다크서클을 가리는? 그리는  화장

같은 상황 달라진 생각

코로나 전에만 해도 외출 시 대부분 화장을 하곤 했다. 마무리 단계쯤 톡톡 컨실러를 손등에 찍어 쓱쓱 잡티 부위에 입혀주면 오른쪽 뺨 밑에 자리 잡은 여린 잡티 서너 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친구를 만날 때는 덜 신경 썼지만. 학부모나 지인, 전 직장동료를 만날 때는 유난히 그 부분에 신경을 썼다. 내 단점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심리였을 게다. 


어느 날 내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 화장의 정도가 변하듯이, 대화의 내용도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됐다. 

비비크림을 휘리릭 바르고 나간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내 잡티만큼 고민도 드러내곤 했다.

반면 얼굴의 잡티를 가리고 만난 상대방에게는 내 걱정도 불안도 잘 털어놓지 않곤 했다.


지인과의 만남에서 얼굴의 단점을 가린 만큼 철저하게 내 마음의 그늘도 덮고 이야기한 날이면,  집에 돌아오는 길, 마음 한구석이 헛헛했다. 그 허전함을 달래려고 집에 오면 꼭 부엌으로 가서 물을 끓여 차를 한잔 마시곤 했다. 천천히 차를 마시며 그날 만남의 뒷맛을 느꼈다.


그럴 때면 슬며시 죄책감도 들었다. 분명 거짓말을 한 건 아닌데... 내 결점, 고민거리를 보여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내 고민을 말하지 않는 건 거짓일까?'

'친하지도 않은데 너무 다 드러내고 말하는 건 친근감을 줄까? 부담감을 줄까? '

'나이 들수록 상대방 이야기 잘 들으려고 안 하잖아? 다 자신의 이야기만 하려고 하지. 그냥 들어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솔직함과 TMI의 경계는 뭘까? '

'상대방이 듣고 싶은 선은 어디까지 일까? 그 선에 딱 맞추면 솔직함이고 그 선을 넘으면 TMI 겠지?' 


어쩌면 만나서 대화를 한다는 건 끊임없이 내 마음의 노출 수위를 정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굳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여러 스토리 중 상대방의 흥미를 끌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이야기를 꺼내 놓는 것, 그것이 만남의 빈도보다 중요한,  밀도를 결정하는 요소다.




다크 서클 메이크업이 화제가 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가리기에 급급했던 다크서클을 오히려 드러내고 심지어 더 진해 보이도록 만드는 화장법이 소셜 미디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 유명 모델이 갈색 립스틱으로 그의 눈밑을 칠하는 영상이 다른 소셜 미디어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눈밑 퀭한 다크서클 그린다, 코로나가 바꾼 청춘 화장법 | 다음 뉴스 - https://news.v.daum.net/v/20210205050117040?x_trkm=t


몇 년 전 얼굴 위에 주근깨를 일부러 그려 넣는 화장법이 유행이란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는 다크 서클도 그리다니... 참 신기하단 생각이 든다. '결핍이 결핍된 자'들의 오만이라고 보기엔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다.


기사의 제목만 눈으로 훑다가 호기심이 생겨 클릭해 내용을 읽어 보았다. 저 화장법을 올린 모델의 인터뷰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다크서클을 결점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길 바란다. 다크 서클은 아름다울 수 있다"라고 말했다.

"2021년엔 나의 모든 불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면 다크서클도 자신감을 가지고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소감을 덧붙였다.


물론 논리적인 모순도 있다. 저렇게 다크서클, 결점, 불안을 받아들이려면 애초에 다크서클을 그려 넣기보다

그냥 화장을 안 하는 게 논리적으로 맞다.  저 다크서클을 그리기 위해 바탕 화장에선 피부를 균일하게 정돈하고 그위에 또 다크서클을 그린다는 게 좀 작위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모델인 이상 화장으로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싶다.


그 대목을 읽고 다크서클 위에 컨실러를 덧칠하며 내 노동의 피로를 감추었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볼 위에 코랄빛 볼터치를 하며 내 안에 이미 사라진 젊음의 생기를 불러 넣으려던 노력도 같이 되살아난다.

끊임없이 내 결점을 지우고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던 내 노력은,

자신의 불안과 결점을 받아들이고 드러내는 저 모델의 당당함 앞에서 왠지 초라하게 느껴진다.


내 다크서클은 역할에 충실하고자 눈 비비며 게으름을 밟고 일어난, 경건한 노동의 부산물이고

내 생기 없음은 천방지축으로 날뛰려는 철없음을 누르고,  자리를 지켜내고자 다독인 마음의 결실이다.


그냥 그대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울 만한 것인데... 난 너무 감추려고만 했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도 저 모델처럼 굳이 더 진하게 다크서클을 그릴 생각은 없다. (내가 저러면 그건 공포다 ㅎㅎ) 그럴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다만  이제는 감추고 덮고 불어넣는 표현(화장)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표현을 하려고 한다.


어쩌면 내 얼굴의 다크서클이 상대방의 피로함을 외롭지 않게 달래줄 수도 있을 것이다. 

다크서클을 드러냄으로써  일상의 고됨을 공유하고 상대방과 서로에 대한 측은지심을 나눌 수 있다.

이제 만남에서 얼굴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마주함에는 공통분모가 필요하다.




설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부터 내 제안으로 차례를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 큰집에서 분리해 오는 거라 모이는 인원이 대폭 줄어든다. 그마저도 5인 이상 집합 금지에 따라 올해는 우리 집 식구 이외에는 아무도 안 오기로) 단출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내 방식에 맞게 간단하고 정갈하게 치를 생각이다. 미리 만들어 놓은 음식을 다시 데워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는, 아마 각종 음식도 딱 그날 소화할 분량만큼만 요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날 아침, 내 얼굴엔 짙은 다크서클이 검게 드리울 것이 분명하다. 다른 때 같으면 다크 서클을 컨실러로 가렸겠지만 이제 그 다크 서클을 그대로 드러내 보일까 한다. 

내 수고와 노동의 산물인 다크서클을 감출 이유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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