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포기 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Prologue
채식을 하면 어떤 일을 겪게 되는 것일까. 채식을 하고는 싶지만 그 과정과 끝을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시도하지 못하는 것 같다. 혹시 단백질이 부족해서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아닌지 또는 동물성 음식이 다시 너무 먹고 싶어서 괴로워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등의 걱정을 할 수 있다. 심지어 혼자서 채식을 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다면 어디서든 정확하고 실제적인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은 만큼 채식에 대한 걱정은 더더욱 커질 것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만약 채식을 실제로 해본 사람이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떨까'하고.
그러면 채식을 이제 막 시작하려 하거나 혹은 채식에 관심이 있어서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며 망설이는 사람들 또는 채식을 하던 도중 고민이 생겼는데 이 고민을 나눌 수 없어서 답답해하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1인 가구인데 혼자서 채식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물론 나와 비슷한 과정을 겪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채식을 무작정 시작한 것이 아니라 차근히 공부하며 시행착오를 거쳐 나름의 철학과 원칙을 세워가며 채식을 했다. 그러한 면에서 실제적인 경험을 통한 유익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채식은 참 어려운 일이다. 특히 혼자서 하려고 한다면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직접 이야기 나누고 싶지만 이렇게라도 도울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 내가 먼저 가본 길을 함께 걸으면서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채식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을 덜 수 있었으면 좋겠다.
번아웃(Burn Out)
나는 학원 강사였다. 주 7일을 일할 수밖에 없는 업무에 시달렸다. 결국 그런 생활을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미디어에서 한창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을 이야기하던 때였다. 돈을 벌기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지만 몸이 먼저 망가졌다.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이런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는 '자괴감'이 크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매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먹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데 먹기만 하는 내 자신이 마치 '좀비'같았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느낌.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답답한 일상은 마치 살아있는 감옥 같았다. 그래서 나는 먹기를 중단했다. 삶의 의미가 없는 상태에서 먹는 음식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을 학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최소한으로 먹기로 하고 '간헐적 단식'을 시작했다. 우연히 찾아본 간헐적 단식책은 하루 세끼 중 아침식사 한 끼의 절반의 칼로리만 섭취하는 것을 권장했다. 나는 책에서 이야기한 대로 식단을 정했다. 밥 반공기에 반찬 조금이 전부였다. (당시에 나는 비건이 아니었다.) 나는 겁 없이 하루 한 끼만 먹는 간헐적 단식을 시작했다.
뜻밖의 교훈: 먹는 것을 멈추자 행복해졌다.
아침에 조금 먹었지만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물론 업무에 치이다 보니 허기를 느낄 새가 많지 않기도 했다. 간헐적 단식 초반에는 잘 느낄 수 없었지만 오후가 지나면서 안 좋았던 기분이 좋아지고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희미하게 보이던 글자가 점차 선명해지는 것처럼 정신이 점차 또렷이 각성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잠시였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여전히 허기는 좀 지지만 그런대로 견딜만하고 기분도 괜찮았다. 오히려 잘 먹었을 때 느껴지는 몸의 둔한 느낌보다는 안 먹었을 때 느껴지는 몸의 가벼움과 날렵함이 좋았다. 이런 기분에서 하는 업무는 능률적이었고 효율적이었다. 집중력이 향상되고 몰입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한번 자리에 앉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음식의 역설: 먹으면 먹을수록 지치는 우리의 몸
당시엔 그런 현상이 내 몸에 일어나는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 몸에 대한 공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소화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는 것. 섭취한 음식으로부터 얻는 에너지의 대부분을 소화에 사용하고 나니 정작 우리가 활동하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해진다. 심지어 소화하면서 생기는 노폐물을 밖으로 배출하는데도 꽤 많은 에너지가 사용되기 때문에 자신이 섭취할 수 있는 음식양의 120%를 먹어도 결국 남는 에너지의 총량은 '마이너스 칼로리'가 된다. 늘 우리가 무기력함을 느끼는 이유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또한 캘리포니아 의학원에서 영양학을 가르치는 하비 다이아몬드('나는 질병 없이 살기로 했다' 저자)는 우리가 질병에 걸리는 7단계 중 첫 번째 단계 역시 '무기력증'이라고 봤다. 무기력증(enervation)은 'energy'에서 파생된 단어다. 즉, 무기력증은 몸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해야 할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모든 신진대사(음식을 흡수해서 소화하고 배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너무 과도하게 독소가 발생하면 이 독소를 제거할 에너지가 부족하게 된다. 이렇게 부족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우리는 평소보다 긴 수면시간과 휴식시간을 갖게 되고 동시에 '식욕부진'현상을 겪게 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소화에는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몸이 아프면 몸보신을 해야 한다며 고기를 먹거나 평소보다 더 음식을 잘 먹으려고 애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휴식과 잠이다. 휴식과 잠을 통해 에너지를 보충해야 하고 소비되는 에너지는 최대한 줄여야 한다. 혹시 먹어야 한다면 소화를 시키는데 거의 에너지가 들지 않는 과일과 채소를 먹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다. 그러나 다양한 음식과 고기를 먹는 것은 많은 양의 독소 배출을 통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무기력하다면 최소한으로 좋은 음식을 먹고 몸이 회복될 때까지 최대한 많이 쉬는 게 답이다.
결론적으로 에너지 소모를 줄이며 더 많은 에너지를 확보하는 원칙은 아래와 같이 정할 수 있다.
음식의 종류(몸이 필요로 하는 과일, 채소, 통곡물 등 섭취) > 음식의 양(에너지 소모 최소화) > 간헐적 단식 (쉼을 통해 몸에 에너지를 확보)
우리가 음식에 과몰입하는 이유
하루 권장량 성인 기준 2000-2500Kcal는 누구나 체질이 다르기 때문에 넉넉하게 잡아 놓은 칼로리 양이다. 굳이 여기에 맞추어 식단을 짤 필요가 없다. 또한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결코 수렵채집을 하며 사는 구석기시대가 아니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도 건강을 유지하며 활동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지나치게 많이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끊임없이 많이 먹는 이유는 '심리적인 허기' 또는 '심리적 공허함' 때문이 크다.
하루에도 몇 번씩 냉장고를 여닫는 우리 모습을 보면 그렇다. 나름의 원칙적인 식습관을 형성한 나도 신경 쓰지 않으면 습관적으로 냉장고를 열어보며 먹을 것을 찾는다. 소셜 미디어에서 느껴지는 상대적인 열등감과 박탈감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며 느껴지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투명과 불안함이 우리의 삶에 대한 정서적 만족감을 떨어뜨리고 '심리적인 허기'를 느껴지게 만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감정적 불안정을 완화하기 위해 우리는 먹는다. 음식 양으로든 음식 자체로든 자극적으로 먹는다. 그래서 먹방 혹은 매운맛의 유행 등이 이러한 우리의 심리적인 상태를 반증한다고 생각한다.
삶의 무게 중 가장 큰 무게인 '음식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다.
나는 우연한 계기로 최소한으로 먹고 단식을 택했다. 생각지도 못한 단식의 결과는 스스로 몸으로 분명히 느껴질 정도로 놀랍고 신기했다. 나는 당시 번아웃 상태로 자존감도 낮고 삶에 의욕도 떨어져 하루하루 견디는 것이 힘들었지만 간헐적 단식을 통해 알게 된 즐거움으로 힘든 시기를 잘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먹는 것을 줄인다고 해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학원을 그만뒀다. 그나마 소득이 있었던 건 음식에 대한 근본적인 나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것.
적게 먹어서 오히려 좋아지는 몸과 정신의 상태를 계속 겪다 보니 여태껏 음식을 너무나 무분별하게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음식을 구할 수 있는 세상에서 늘 음식을 품에 끼고 있는 내 모습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나는 더 이상 음식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이런 음식에 대한 태도는 비건으로서의 전향의 발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