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을 위한 채식의 기본틀: 현미밥과 나물
채식으로 가는 식습관의 '틀'
바로 지금부터 채식을 하기로 했다면 무엇을 먹을지를 정해야 한다. 무작정 채소만 먹겠다고 하는 추상적인 계획은 채식 생활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는 식사에 대한 일정한 '틀'이 필요하다. 이 '틀'이 정해지면 매일 무엇을 먹어야 할지, 또 내가 먹는 음식에 영양소는 충분한지 등에 대한 고민을 덜 수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육류나 유제품을 먹지 않고도 채식을 통해 만족감을 충분히 얻으려면 입맛이 변해야 하는데, 규칙적이고 일정한 식습관이 그 변화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채식을 할 때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 그동안 내가 겪었던 경험과 지식을 통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우리 몸에 맞는 음식의 종류는 따로 있다.
나는 채식을 위해 영양과 관련한 다양한 책을 읽었는데, 책의 저자들은 모두 생리적, 인류학적 근거를 과학적으로 제시하면서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존 맥두걸 박사, 더글라스 그라함 박사, 콜린 캠벨 & 토마스 캠벨, 하비 다이아몬드 등의 저서들이 있다.
이들의 주장하는 공통점은 탄수화물 중심의 식사를 하고 지방과 단백질을 적게 먹으라는 것이다. 세계적인 로푸드 다이어트(rawfood)의 권위자인 더글라스 그라함은 그의 저서 [산 음식, 죽은 음식]에서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의 비율을 80/10/10(칼로리 비율)으로 정하고 있다. 모든 영양소는 자연에서 얻은 음식인 과일과 채소로부터 얻어야 한다고 모든 채식 관련 학자들이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런 점들을 참고해서 그동안 나와 아내는 주로 과일과 채소 위주의 식사를 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영양소는 충분했지만 칼로리가 적어서 배고픔을 자주 느끼고, 매 식사에서 많은 양의 채소를 먹어야 했다. 이런 문제는 곧 자주 식재료를 구매해야 하는 결과로 이어져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되었다. 과일은 통째로 먹어야 영양가가 높기 때문에 대체로 유기농 또는 무농약 과일을 구매해야 했는데 일반 과일보다 1.5배 이상 비쌌기 때문에 구매할 때마다 부담이 되었다.
결국 내가 내린 판단은, 국경을 넘어 인종에 관계없이 우리에게 필요한 영양소와 그 양은 모두 비슷하지만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지역의 특이성과 오랫동안 지속해온 식문화(전통)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과일과 채소가 건강에 좋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여 알고 있었지만, 잦은 과일 섭취로 오히려 속이 쓰리거나 소화가 안 될 때도 있었다. 사계절이 비교적 뚜렷한 우리나라의 날씨는 우리의 몸의 상태에 영향을 끼치는데, 한 겨울의 서늘한 오후에 찬기운의 생채소를 먹는 경험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밥 대신 고구마나 감자를 먹는 일도 종종 있었는데, 고구마와 감자를 많이 먹어도 심리적으로 충분히 먹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다. 식사 후의 포만감이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두 느껴져야 하는데, 과일과 채소로 하는 식사는 늘 뭔가 부족했다.
현미와 나물 밥상을 주식으로 하자.
그래서 나는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내게 제일 맞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채식이라는 범주안에서 열심히 찾아보았다. 그것은 우리가 집밥으로 알고 있는 음식들이었다. 특히 나물과 현미밥으로 이루어진 밥상은 경제적이면서 편리하다. 또한 굳이 과학적으로 그 영양소의 비율을 따지지 않아도 우리는 현미밥과 나물 밥상으로 영양이 고루 잡힌 이상적인 식사를 할 수 있다.
요즘은 비닐하우스 농사가 잘 돼서 사시사철 싱싱한 나물을 얻을 수 있다. 한겨울에도 향이 좋은 냉이 나물이나 달래가 나온다. 언제든 다양한 나물 반찬으로 입맛을 돋우는 식사를 할 수 있고, 지친 몸에 활기를 더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나물 조리법은 나물 본연의 맛과 향을 잘 드러낸다. 식재료의 본연의 맛을 그대로 살리는 좋은 조리법이다. 대표적인 조리법으로 나물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국간장과 소금, 참기름을 더해서 무치면 된다. 처음엔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한 두 번만 해보면 금방 익숙해진다. 15분 안에 신선한 나물 요리 한 접시를 완성할 수 있다. 아주 경제적이다.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그 맛과 영양학적 가치가 뛰어난 나물 요리는 우리의 식생활을 효율적으로 만들어준다. 여기에 다양한 찌개 또는 국을 더하면 미각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더없이 풍성한 식사를 할 수 있다.
이렇게 현미 밥상을 주식으로 먹고나서부터는 과일과 채소를 많이 섭취할 때와는 달리 속이 편안했고, 잦은 허기짐으로 무언가를 계속 찾아 먹어야 하는 일이 없어졌다. 먹고 나서 기분도 꽤 좋았다. 잘 먹었다는 느낌과 함께 심리적인 안정감이 찾아왔다. 또한 식욕을 점심과 저녁의 일정한 간격으로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충동적으로 무엇인가를 먹는 일도 줄어들었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아침은 아예 먹지 않거나 과일 몇 조각 정도 먹는다.) 다이어트 아닌 다이어트를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살찌는 1차적인 원인은 너무 많이 먹는다는 것인데, 자각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는 너무 많이 먹는다. 배고파서 먹고, 심심해서 먹고, 짜증 나서 먹고, 우울해서도 먹는다. 때론 길거리를 지나가다 무심코 음식점 광고에 홀려서 먹기도 한다.
하지만 현미 나물 밥상으로 끼니를 규칙적으로 잘 챙겨 먹으면 정서적 자극이나 외부의 자극 때문에 발생하는 충동적인 먹는 행위를 통제할 수 있다. 매일 일정하게 먹는 규칙적인 식사로 인해 점차 입맛이 예민해지고 몸이 건강해짐을 느낄 수 있다. 몸이 좋아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면 이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채식에 대한 동기를 더 강력하게 부여할 수 있고, 먹는 것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누군가는 현미 나물 밥상 대신 다른 음식을 먹어도 되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다. 배만 부르면 다른 음식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음식의 양 자체로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지만, 적게 먹어도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먹으면 충분히 먹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우리 몸은 가짜 영양소와 진짜 영양소를 판별한다. 가공되지 않은 탄수화물을 먹어야 우리의 체력이 유지되고, 정서적, 육체적 포만감을 모두 느낄 수 있다. 면이나 빵은 배부르게 먹어도 먹고나면 늘 다른 음식이 생각난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음식 양의 문제가 아니라 영양학적 결핍의 문제 때문이다.
앞서 나물 요리와 현미밥을 채식의 기본 식사로 추천했지만 이밖에도 계절에 따라 조금씩 음식의 종류를 바꿀 수 있다. 쌈채소, 두부, 유부초밥, 무조림, 감자볶음 등등 어릴 적 엄마가 해주셨던 음식들이 있다. 햄이나 소시지 같은 인스턴트 식품들이 별로 없었던 시절에 우리가 먹었던 채소음식들을 떠올려보면 얼마든지 맛있는 밥상을 차릴 수 있다. 그래도 막막하다면 서점에서 요리책 한 권을 사는 것도 추천한다. 특별한 음식이 나와있는 요리책보다는 일상에서 직접 해볼 수 있는 나물 요리에 관한 책이나 채소반찬이 많이 나와있는 책을 추천한다.
채식은 식습관이다. 물론 이 식습관에는 우리도 잘 모르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어쨌든 단순하게 생각하면 '먹는 일'이다. 채소를 먹는 일이 습관이 되면 일단 채식은 성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채소를 편하게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자주 먹으려면 규칙적인 식습관을 잘 지켜야 하는데 하루 2-3끼의 식사를 챙기는 것이 이런 식습관을 만드는데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