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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Jan 29. 2023

내 인생의 특이점-1

첫 아이를 만나던 순간-1

 


 에마뉘엘 레미나스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아주 재미난 말을 했다. 내가 나 자신에게 스스로 타인이 되는 방법이 있다면 바로 부모가 되는 것이라는, 이게 대체 뭔 말인가 싶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나를 넘어서는 나를 만나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아이는 나지만 나는 아닌 존재 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뼈저리게 (실제로 뼈가 저린다. 많이) 느끼게 되는 와중에 그 과정을 인문학적 사고로 칠해 보고 그 열 달을 그리고 그 이후를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의 기회로 만들고 싶었다.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


우리 부부는 2014년 결혼했다. 5년의 연애 끝을 결혼으로 나름 해피엔딩 맺었다. 동갑내기 부부가 서른한 살에 결혼을 했으니, 당시로서는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시의적절했다. 코로나바이러스란 것도 없었고 집값은 언제나 우리에게 비쌌고 앞으로도 비쌀 예정이지만 지금처럼 미친놈처럼 날뛰지 않았었으며, 친구들 간에 축의금 논쟁에서도 지금보다는 클린 했던 지금에 비하면 황금빛 시기였다. 천주교 집안에서 나고 자란 두 선남선녀는 (선남선녀의 선 자는 놀랍게도 착할 선자이다) 당연하게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가족도, 지인도, 친구도 성당 교우들이 많았기에 유난스럽게 더 길었던 혼인 미사에 기쁘게 참례해 주었다.


 우리 부부는 욕심도, 철학도, 미래에 대한 계획도 딱히 없던 부부였다. 아이 문제에 있어서 더 그랬다. 둘 다 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잘 키울 자신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하지 말고 1년은 우리끼리 재미나게 잘 살아보자 했다. 둘이 맛있는 것도 먹고 여행도 다녔다. 룰루랄라 하는 우리들 너머로 양가 어른들의 걱정의 빛이 어렸다. 시댁에서는 아기를 기다리시는 기색이 역력했고, 친정도 마찬가지였는데 왠지 내가 몸이 약하고 체구가 작아서 아이가 안 생긴다고 걱정을 하시는 것 같았다. 거기에 대고 어머님, 아버님, 엄마, 아빠. 우리 피임하고 있어요.라고 말 할 순 없어서 그냥 모른척했다. 나는 당시 30대 초반, 선천적인? 수족냉증을 갖고 있었고, 체중은 키 158에 46킬로, 흔히 말하는 미용체중이었다. 딱히 다이어트나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위장이 좋지 않고 어쩐지 소화력은 점점 더 안 좋아져 살이 통 붙지 않았다. 어른들은 내 몸이 부실하여 아기가 들어서지 않는다고 걱정하실 만도 했다. 그렇다고 신랑이 장대같이 큰 사람도 아니다. 그 역시 오종종하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우리는 피임은 하지 말되, 큰 노력도 하지 말아 보자고 했다. 물론 어떤 가능성에 대비하여 결혼을 하고 산부인과 임신 관련 검사는 다 해 둔 상태였고 약간의 빈혈과 저혈압이 있을 뿐, 다른 기능적인 문제는 하나도 없다 하였으니, 이제부터 아기가 생기건, 안 생기건 모두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그리고 몇 달 뒤 아기가 찾아왔다. 딱히 어떤 징조나 꿈은 없었다. 첫 임신을 확인한 후의 감정도 무덤덤. 신랑 역시 무덤덤. 볼 일이 있어 신랑 혼자 시댁에 잠깐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혹시 모르니 아직 이야기하지 말라고만 당부해 두었고, 신랑은 하루 이틀 후 연차를 냈다. 임신 확인을 하러 병원을 함께 가야 하니 말이다.


 방문한 병원의 간호사, 의사도 일상인 듯 임신테스트기를 하시고 오신 거냐고 물으셨고 그렇다고 하니 거의 확실할 거라고 하며 초음파를 일단 보자 했다. 임신 초기의 산부인과 초음파는 배에다 문지르며 사랑스러운 아기가 꼬물거리는 모습을 확인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질초음파. 굴욕자세로 다리를 벌리고 누워야 한다. 그리고 저기 콩알만 한 것을, 그냥 사진만 봤으면 아무것도 몰랐을 그 작은 점 보고 아기집이라고 했다. 네. 뭐 다른 할 말이 있었을까. 다 예상하고 온 일. 그 초음파만 빼고 말이다. 심장 소리는 아직 들을 수 없다고 했고, 예정일을 알려 주었다. 의사는 축하의 인사를 건네면서도 임신은 그냥 생활이라고 말했다. 병이 아니고 질환도 아니고, 그냥 인생의 일부 생활이니 하던 것 하시고, 술 담배 빼고는 먹던 것을 다 드시되 많이 먹지만 말라고. 나는 미용체중의 날씬한 여자, 아니 그때부터는 산모였는데도 많이 먹을 필요 없다고 하셨다. 맛없는 걸 맛없게 먹으라고. 건강한 음식을 적당히 먹으라는 말씀을 그렇게 해 주셨다. 이게 뭔 말인가 방군가 싶었지만 나처럼 체구가 작은 산모가 임신 후 급격히 살이 찌면 더 위험하고 안 좋으니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유난 떨 것 없다고, 과격한 운동 빼고는 움직이던 대로 움직이라고.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된다고 하셨다. 나는 임신했다고 몸을 팍 사그릴 성격도 아니었다. 많이 먹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먹고 싶은 것을 참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산부인과 진료를 보고, 양가에 기쁜 소식을 알리고, 그냥 정말 살던 대로 살았다. 딱 1주일 동안, 그 지옥 같던 입덧이 시작되기 전까지.


 입덧이 무슨 느낌이냐 하면, 내가 예전에 일을 할 때 통영으로 다 같이 워크숍이라는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하루 종일 산해 진미를 먹고, 밤에 부어라 마셔라 술을 마시고 아침을 또 든든하게 먹고 우도에 들어가는 배를 일렁이는 파도를 견디며 왕복으로 타고 나온 상태에서 성게 비빔밥을 먹고는 오는 길에 멀미에 시달리다 그만 왈칵 토를 한 적이 있는데 딱 그 느낌이 한 달 반 동안 지속되는 느낌이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방울토마토? 청포도 사탕, 가끔씩 치킨이 먹고 싶어 먹었었는데 토할 때도 있고 다행히 흡수가 될 때도 있었다. 몸무게는 더 빠졌다. 임산부의 몸무게가 43킬로가 된 것이다. 산부인과에서는 너무 힘들면 입덧 방지 주사와 약을 처방해 주겠다고 하였지만 나는 그냥 됐다고 했다. 그것도 효과가 복불복이라는 얘기를 들어서 이다. 입덧 기간에 처음 느낀 것들이 많이 있다. 버스와 지하철에서 역한 냄새가 난다는 것. 담배와 향수, 술냄새가 뒤 섞인 냄새는 임신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냄새였고 거기에 음식냄새가 섞이면 정말 올라오는 토를 누르고 내려야만 했다. 그 후로 나는 음식을 포장을 해서 대중교통을 타지 않는다. 어쩌면 그 안에 나처럼 티 안나는 입덧하는 임산부가 있을 수 있기에. 그렇게 한 달 반을 살았다.


 입덧이 사그라드니 먹을 수 있어졌는데 원래 먹던 양 이상을 먹지는 못했다. 원래 소화기 안 좋아 많이 먹지 못하는데 임신 중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해골 같았던 얼굴은 점차 회복이 되었지만, 초산모라 그런지 배도 많이 불러오지 않아서 임신 6개월, 7개월이 되어서야 눈에 띄게 배가 보이기 시작했고 그전까진 심지어 원래 입던 청바지도 입고 다녔다. 하나도 불편하지 않게. 급격한 체중증가를 저체중보다 더 걱정하셨던 의사 선생님이 그제야 나에게 밥을 많이 먹으라고 하기 시작하셨는데, 저는 많이 못 먹어요. 쓰앵님. 하니 거르지만 말라고 하신 것 같다. 담당 간호사도 더 여윈 나를 걱정하면서도 이런 분들이 간혹 계시다고, 영양가 있는 걸로 드시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렇게 나의 몸은 의료진에게는 유난 하지만 괜찮은 몸이었는데 양가 부모님들께는 걱정거리였다.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 없냐고 물으시고 음식을 싸 들고 수시로 들여다보셨지만 (양가 모두 차로 15분 거리) 나의 몸은 임산부스러워지지 않았고 신랑이 조금 살이 붙었다. 친구들만 살이 대신 찌는 엄청난 신랑이라며 추켜세웠다. 나는 그렇게 임신 막달을 맞았다. 몸무게는 50킬로, 아기의 몸무게는 임신 막 달에 2킬로가 채 되지 않았다. 초음파 상에서 큰 문제를 발견하진 못했지만 아기가 저체중이라는 건 일반 산부인과에서는 분만을 받아주기 힘들다는 얘기가 된다. 왜냐하면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보다 더 큰 시설인 신생아 집중치료실에 가서 이런저런 줄을 달아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건 내가 대학병원급의 큰 병원에 가서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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