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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Feb 22. 2023

모든 아기 엄마들에게.

우리 모두 힘내요.

 육아라는 태풍이 저쪽 동해안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폭풍 전야부터 시작하여, 한창 두 아이 육아에 몸과 마음이 무너질 때면 중심 저기압이 100 헥토파스칼 정도나 되는 엄청난 태풍이 나를 휘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태풍은 종류가 다르게 쉬지 않고 나에게 왔다. 돌도 안 된 아기가 울고, 네 살배기 형아가 떼를 부릴 때, 그 아기와 형아가 나란히 수족구에 걸렸을 때, 그때의 태풍은 중심 저기압이 아마 0 헥토파스칼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아이들이 자라며 태풍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더니 이젠 저쪽 동해안으로 조금 물러간 것 같다. 빈도와 세력이 다를 뿐 인생에서, 육아에서 태풍은 꾸준히 찾아오겠지만 잠깐이라도 쨍하고 해 뜰 날을 볼 수 있어져, 간헐적이나마 일광욕이 가능해지고 바닥까지 내쳐진 감정을 일광욕을 하며 비타민 D처럼 충전할 수 있어졌음에, 그동안 무탈하고 또 무탈하였음에 감사하다.


 나의 친한 친구가 지금 아기를 키운다. 첫 아이도 둘째 아이도 나보다 늦게 아 육아를 조금 늦게 시작한 경우이다. 그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네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둘째까지 낳고 아이 둘을 키울 때에 자기는 그런 상황에 놓여보지 않아서 아무런 도움이나 위로를 주지 못했었는데, 나만 첫 아이 낳고 둘째 낳으며 너에게 위로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고 고맙다고. 물론 내가 큰 위로나 도움을 주진 않았다. 그저 힘들 때에 힘든 마음을 알아주고, 같이 아무 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남편을 욕해주었으며 친구의 손목 걱정을, 이유식 그까짓 거 늦게 해도 괜찮다고 해 주었을 뿐. 그렇다고 내가 아이 둘을 오로지 나 혼자 키운 것도 아니었다. 먼저 아이 둘을 키운 또 다른 친구들이 나에게 똑같이 그런 위로와 도움을 주었다. 육체적인, 경제적인 대단한 도움이 아니더라도 엄마 됨의 힘듦과 혼란스러움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위로이고 도움이었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무척 피곤하다. 그리고 예민하다. 완벽히 1인분으로 설계된 내 몸뚱이 하나를 여럿으로 쪼개서 써야 한다.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이 다 쪼개어진다. 어린아이 둘을 돌보기가 한창일 때는 하루 종일 나 혼자 엉덩이대고 앉은 적이 없던 날도 많았다. 앉아 있을라 치면 어느 한 놈이 와서 무릎에 앉거나 등에 업힌다. 그렇지 않으면 일어나서 혼자 집안일을 하거나, 한 놈을 안거나 업고 집안일을 해야 했다. 두 아이를 모두 재우고 혼자 누울 때, 비로소 처음 나 혼자만의 몸을 가진 날도 수두룩히 많았다. 몸뚱이뿐만 아니라 머리도 그러하다. 엄마들이 자꾸 깜빡깜빡하는 이유는 1인분으로 혼자만을 위해 써야 하는 머리를 아이들 몫까지 2-3 인분으로 쪼개 써야 하기 때문에 용량이 모자라서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침에 애들 이것저것 챙겨주고 나면 내 양말 신는 걸 잊어서 한 겨울에도 맨발로 등원을 시켜주기 일쑤이며, 책을 한 권 읽고 싶어도 그놈의 오늘 뭐 먹지 귀신 때문에 도무지 책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 돌보는 일은 피곤하다.


그런데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나를 지탱할 연대가 없다는 것이다. 엄마는 아이를 천덕꾸러기로 만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온갖 눈치를 다 보는데, 돌아오는 것은 따가운 눈총일 때, 이런저런 육아정보가 넘쳐흐르지만, 거의 다 장삿속일 때 혹은 선을 넘는 오지랖일 때, 정작 나에게 필요한 정보는 자력갱생으로 스스로 얻어야 하며 그 마저도 모든 책임을 내가 뒤집어쓴다는 비장한 각오로 임해야 할 때. 아이의 모든 것이 잘 못 되면 내 탓이고, 잘 되면 그저 조상 덕일 때, 온전한 내 편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은, 참으로 개떡 같은 기분이다.


 아이고, 조금만 참으세요. 진짜 조금만 참으면 훨씬 덜 힘들어져요. 내가 둘째를 아기띠로 안고 큰아이의 손을 잡고 조심조심 2층에서 1층으로 계단을 내려갈 때, 1층에 사시는 두 딸을 키우는 엄마가 나에게 해 준 말이다. 어떤 날은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정말 힘들 땐데, 진짜 금방 지나간다고. 냅다 앞만 보고 달리는 아들 둘을 쫓아 뛰며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나를 보고 동네 할머니들이 아이고, 그래도 저 때가 좋을 때다. 엄마가 힘들어도 애들이 얼마나 이뻐, 하시기도 했다. 아장거리는 둘째와 두 살 많은 형아의 손을 잡고 마트를 가면 많은 분들이 계산대에서 순서를 양보해 주셨고, 가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할 때도 많은 분들이 벌떡 일어나시며 교통약자를 얼른 배려해 주셨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좋다, 나쁘다로 정의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만나는 세상의 크기와 면면, 감정의 폭이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어마어마하게 커졌음은 확실하다. 사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육아라는 태풍이 조금 잠잠해진 지금에 와서나 가능하지 태풍이 한가운데에서는 생각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치였음을 고백한다.       


 따뜻한 사람들의 연대. 같이 하고는 싶지만 뭔가 거창하고 복잡하게 들린다면, 일단 웃어주는 건 어떨까.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


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힘들다. 그런데 아이를 돌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무관심하고, 혹은 맘충이라는 입에 담기도 싫은 혐오의 말을 꺼내기도 한다. 상처다. 옛날에 우리를 돌봐 길러주신 어른들은 종종 세상 참 좋아졌다는 말씀으로 힘들다는 하소연도 민망하게 하신다. 물론 일부다. 생각해 보면 두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따뜻한 시선, 예뻐 죽겠다는 미소, 아들 둘을 키우는 엄마에 대한 격려를 더 많이 받았다. 하지만 아이를 돌보는 사람은 너무 힘들어서 가끔 돌아오는 뾰족한 시선에 쉽게 상처받고 오래 기억한다.


나는 이제 유모차에 누워 있는 아기들을 보며 할머니 미소를 짓는 아줌마가 되었다. 그리고 아기를 돌보는 엄마들을 보며 아무 말 없이 그냥 웃고 지나간다. 필요하면 엘리베이터를 잡아주고, 떨어뜨리는 물건이 있으면 주워 주고, 식당에서 아기가 울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마트 계산대에서 순서를 양보하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들이다. 내가 어린아이일 때부터,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가 되기까지 세상으로부터 받은 모든 작은 도움과 배려들을 이렇게 갚는다고 생각한다.


아기를 키우시는 분들, 모두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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