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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Dec 24. 2022

일기 쓰는 아이.

엄마의 큰 그림. 

아이는 일기를 쓴다. 일주일에 최소 닷새는 일기를 쓰도록 지도하고 있다. 초등 2학년에 그림일기를 일주일에 한두 번 일기를 쓰는 것이 정규 교육과정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입학도 하기 전에 이렇게 지독하게 일기 쓰기를 시키는 것은 어쩌면 욕심일지 모르겠다. 

 

여섯 살 때부터 엄마와 함께 시작한 그림일기는 이제 혼자 쓴다. 주로 저녁을 먹고 엄마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혼자 일기를 써서 설거지가 끝날 때쯤 검사를 받는다. 처음 일기 독립을 한 후에는 옆에서 같이 쓸 때와는 다르게 띄어쓰기나 맞춤법 실수가 많았다. 그래도 옆에서 함께 해 주지 않았으니 틀린 것을 전부 고치게 하지는 않았고 너무 명백한 실수, 한 글자만 옮기면 되는 띄어쓰기 실수 정도를 고치는 것으로 검사를 해 주었다. 그러면서 일기장도 커다랗고 두꺼운 스케치북 일기장에서 일반 공책 일기장으로 넘어왔는데 일단 부피와 무게가 적게 나가니 다 쓴 일기장 보관이 수월해서 좋다. 아이의 모든 작품, 예컨대 유치원에서 만들어 오는 것들, 조각조각 자르고 오리고 붙여서 엄마에게 선물이라고 내미는 종이들, 그리고 하루에도 몇 개씩 만들어지는 종이접기 작품들까지, 이런 것들은 수일 내에 눈치껏 버리는 것이 내 일중에 하나인데 일기는 버려지지가 않고 차곡차곡 모으게 된다. 그것이 일기에 대한 특별함인지, 아니면 아이의 일기란 작품에는 나의 공로가 조금 들어갔다고 내 공을 버리는 것이 아까운 이기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의 일기는 말이 일기이지 그냥 글쓰기에 가깝다. 하루 일과를 적기도 하지만, 배운 것을 풀어 설명해 놓기도 하고 가끔씩은 엄마에게 편지, 반성문을 쓰기도 한다. 아직 좋은 일기,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일기란 하루 일과 중 어떤 일을 골라서 그 일에 대한 상세한 전개 과정, 느낌, 특별하게 기억하는 이유 등을 쓰는 것인데 그것 까진 아직 어렵다. 그러니 하루 일과를 나열하는 수준의 일기만 반복하게 되어 아이 스스로도 일기를 쓰려면 유치원에 가서 간식을 먹고 활동지를 하고 오늘은 미술 실에 갔었고 의 사건만 나열하는 것이 조금 지겨운 모양이다. 뭐에 대해서 쓰겠다고 먼저 제안할 때가 있다. 그게 동물이나 곤충에 대한 것이든, 요즘은 유치원에서 세계 여러 나라 프로젝트를 하기도 했는데 월드컵도 열려서 다시 세계, 다른 나라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나라에 대해서 자주 쓴다. 

 

저녁을 먹으며 일기를 뭐라고 쓸지 먼저 물어본다. 내가 쓰는 걸 봐주지 않으니 뭐라고 쓸지 먼저 얘기하기 해서 결재를 하는 셈이다. 말과 글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간이기도 하다. 머릿속에서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채로 나오는 말을 글쓰기에 맞게 함께 생각하고 고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유럽에 나라가 많은데 프랑스가 유럽이야. 아, 그러면 프랑스는? 유럽에 있는? 나라예요? 한 번의 물음표마다 아이의 대답을 유도하는 것인데 첫 번째 물음표에서 나머지 문장을 옳게 말하기도 하고 틀리게 말하기도 한다. 파리가 수도잖아. 하면 프랑스의? 수도는? 파리예요? 그다음은, 건축물도 있는데 에펠탑이에요. 그러면 파리에 있는? 유명한? 건축물은? 에펠탑이에요. 그러면서 에펠탑이 백주년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어느 책에서 봤는지 영상에서 봤는지 유식한 말을 하기도 한다. 혁명이나 박물관 이야기는 너무 어려울 것 같아 엄마가 큰맘 먹고 꿀팁을 하사한다. 프랑스에 가면 뭐가 맛있는 줄 알아? 바게트, 마카롱, 그리고?? 크?로? 와? 상! 이것도 쓰면 좋겠네. 이런 식의 대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나눈 후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저 쪽에서 끄적끄적 쓰고 내키면 그림에 색칠도 해서 갖고 와서 보여준다. 처음에는 내가 전문가가 아님에도 눈에 띄는 비문들이 많았다. 단어들의 호응을 틀린 경우, 생각나는 대로 문장을 길게 쓰다가 주어와 서술어가 일치하지 않게 산으로 간 경우, 낱말의 어감, 즉 긍정적인 느낌의 형용사와, 부정적인 느낌의 형용사를 구별하지 못하여 문장의 의미가 모호해진 경우, 어설프게 배운 속담이 섞인 경우들이 있었다. 

 


 김칫국과 떡을 먹으면 안 맵다. 떡 줄 사람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와 작은 고추가 맵다의 합성어이다. 김칫국, 떡, 작은 고추 중에 아이가 먹을 수 있는 건 떡 밖에 없으니 이런 의미들이 와닿지 않았을 것 같다. 떡을 먹을 땐 물이나 주스를 마시고, 김칫국과 고추는 매워서 못 먹는 아이이니, 아이의 입장에선 김칫국과 떡을 함께 먹으면 안 매운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의미는 매운 김칫국도 떡과 함께 먹으면 덜 매운 것처럼, 위기가 닥쳤을 때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해 놓으면 수월히 극복할 수 있다 정도가 되려나, 엄마의 너무 큰 상상이었니? 

 

아이는 거의 매일 글을 쓴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글쓰기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말과 글의 차이을 이해하고 어법과 어순에 맞추어 일정하고 적절한 톤의 글을 분량에 맞추어 쓴다는 것은 고도의 두뇌 활동이라고 믿는다. 글씨를 쓰는 동안 손의 힘을 기를 수 있는 것도 좋다. 쓰기 싫어도 참고 앉아서 쓰는 책임감과 참을성, 성실함을 배우는 것이라 그것도 좋다. 좋은 영상, 나쁜 영상 포함해서 영상 자료, 디지털 기기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나는 연필, 공책, 손 글씨, 스스로 글짓기의 힘을 믿는다. 적어도 진학할 때, 입사할 때에 써야 할 이력서, 자기소개서, 에세이에 ㅋㅋㅋ, ^^,~~같은 구어체의 문구들은 쓰지 않으리라. 더불어 생각하는 힘이 길러지고, 한국어의 완전한 문장을 만드는 연습을 통해 외국어의 작문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장 요소들이 정확하게 구별 되게 간결한 글을 쓸 줄 아는 것이 외국어 작문의 기본이니 말이다. 

 

일기 쓰는 아이야, 엄마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완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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