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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현 Nov 15. 2023

[단편소설]순례(1)

  겨울은 바다의 손부채질마저 날카롭게 벼린다. 두꺼운 점퍼와 목도리 틈새를 잔혹한 밀도의 추위가 악의 없는 얼굴을 하고 비집는다. 눈이 건조하게 말라 수시로 질끈 감는다. 해변으로 힘없는 파도가 밀려온다. 나는 거기 서 있다. 다리를 좁게 붙인 채 좌우로 비틀거리면서. 동시에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며. 시야 끝에서 흐릿하게 뜨는 해가 보인다. 얼굴이 고장 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얼굴의 응당함을 주장할 수 있도록. 귀에서 이어폰을 뽑는다. 어차피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하루와 하루와 하루의 것들을 이야기하는 듯한 파도 소리가 아무 방해 없이 들려온다. 파도는 말하지 않는다. 내가 파도의 말을 만들어낸다. 만들어내고 싶지 않아도 사방에 돋아난 입술이 있다. 무표정의 움직임으로 끊임없이 말하는, 나에 의해서.

  해변을 바라보며 어깨동무하듯 늘어선 식당들의 문이 닫혀 있다. 끝에 다다른 새벽. 오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드문드문 주차된 자동차들 역시 고요하다. 평일의 바닷가는 하루를, 혹은 찾아올 주말을 대비하기 위해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어제 점심을 먹었던 식당 앞을 지난다. 거기서 찍은 사진들이 고스란히 저장돼 있다. 몸을 떤다. 단단히 잠긴 식당 사이로 덩그러니 놓인 편의점이 있다. 언제나 손님을 받아야 하는 아르바이트생은 졸고 있다. 문에 매단 종이 울리고서야 잠에서 깨어난다. 나는 과자와 빵과 도시락, 음료 사이를 오간다. 포장지마다 새겨진 젊은 광고 모델의 미소가 어지럽다. 그들을 구기지 않으며 상품을 사용할 방법을 모르겠다. 온장고를 연다. 겉에 로고와 성분표 정도만 기재된 두유 한 병을 사 마신다. 계획보다 여섯 시간 이른 체크아웃을 알리기 위해 메시지를 보낸다. 화면 상단의 ‘LTE’ 표시를 오래 바라보고 싶지 않다. 지도와 교통을 확인하고서 모바일 데이터를 끈다. 밤사이에 많은 연락이 오진 않았다. 그러나 결국 오게 될 연락들이 있다. 끔찍한 목소리들이 순진하게 달려올 예정이다. 두엇의 카카오톡 알림을 옆으로 밀어 지운다. 어떡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자신이 우습다. 고작 그런 걸로.

  버스를 기다리다 운 좋게 지나던 택시를 잡는다. 기차역을 말한다. 기사는 알겠다는 말 대신 기차역의 이름을 되묻는다. 둘의 침묵 사이로 라디오 소리가 기어 다닌다. 실시간 교통정보와 광고, 정치사회, 연예계 이슈 따위다. 기사가 쯧, 소리를 내고 나는 애써 창밖을 본다. 어제까지 색으로 가득했던 풍경의 생기를 새벽안개가 앗아가고 있다. 잠시뿐이고 날씨는 좋아질 예정이라고 했다.

  역에는 사람이 얼마 없다. 몇몇 얼굴에 새겨진 빛이 언뜻 보인다. 어쩌면 상대적인 밝음에 불과할 수도 있다.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다. 눈이 멀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한 켠에 자리한 상가는 영업준비로 분주하다. 어묵을 파는 모양이다. 훈기를 상상한다. 역내는 누가 강제하지도 않았는데 고요하다. 침묵보다는 비축에 가깝다. 캐리어 끄는 소리가 고요를 가로지른다. 저마다 그 소리에 동조하는 것 같다. 상가를 다시 바라본다. 그곳의 권태만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움직임이다. 열차가 도착하기 오 분 전이 되자 작고 낡은 전광판에 문구가 나타난다. 작은 빛깔들이 만드는 글씨와 그림이 여행의 설렘과 연결된다. 기차에 탄다. 출발하고 머지않아 음악이 흐른다. 열차 내부 객석통로 상단에 작은 모니터가 있다. 거기서 최신 뉴스와 광고, 역 안내가 나온다. 나는 머뭇거리다 용기를 내어 품에서 포토카드를 꺼낸다. 세팅된 머리와 메이크업으로 그는 더 완벽하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혹여나 이 천박함을 들킬까, 알아볼까 싶어 은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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