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는 제주 섬(島) 437km, 27개 코스
2025년 6월 26일, 나는 29년간 일하던 직장을 마무리하고, 그날 밤 17년 된 낡은 소나타로 트렁크와 뒷좌석에 살림을 잔뜩 실고, 서울 장위동 집에서 진도 舊) 팽목항을 향해 달려가서, 다음날 새벽 제주 오는 쾌속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남해바다는 그 어느 때보다 푸르렀으며, 시원한 바람을 타고 갈매기는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바다 위를 비상(飛上)합니다. 잠깐 '날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내게는 날개가 없습니다. 대신 내게는 아직 건강한 두 다리가 있습니다.
2025년 8월 1일부터 나는 437km의 섬(島)을 걸어 나갔습니다. 사실 내 힘으로 걷기보다는 길이 나를 받쳐 주었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길은 낯선 나를 가볍게 안고 넘실대는 바다와 넉넉한 산, 반가운 마을, 두렵지만 용기를 갖게 해 준 어두운 숲길을 등대처럼 불을 밝혀주며, 나를 업어서 나가게 했습니다. 경이로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시시각각 바다가 다른 빛을 내고, 숲과 파도가 같은 소리로 부르짖고, 시원한 공기가 코로 들어와 폐를 통과해 내 몸을 여태까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팽창시키며, 나를 다른 체질의 몸으로 바꿔 주었습니다. 나는 내 몸의 변화를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3개월 만에 나는 도시의 찌든 때가 다 씻겨 내려가고, 길 위의 비자림나무와 곶자왈 덩굴과 현무암이 되어 갔습니다.
올레 길은 다음과 같은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첫째, 여태까지는 내 안에 있는 숱한 문제와 질문을 그 누군가와 말하고, 거기에서 해답을 찾으려 했다면, 올레 길은 문제를 나 스스로 묻고 답하게 했습니다. 나는 남의 생각이나 의견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내 내면의 목소리에만 집중하고, 이해하려 했습니다.
둘째, 나는 장래보다는 과거를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 돌아가신 아버지, 삼촌, 옛 친구들... 다들 떠나서 이제 내 곁에 사라진 분들을 떠올리며 언젠가 나도 떠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가 길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나는 시작과 끝을 신께 기도하고 감사했습니다. 매사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15-20km를 매일 걷는 것이 두려웠고, 현무암 돌조각이 왼쪽 발바닥을 짓눌러 온몸을 감전시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뱀에 발목을 물릴까 봐 두려웠고, 온 산이 무덤으로 뒤덮인 곳이 혹시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히지는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내가 깨달았던 것은 그 모든 것이 두려움이 아닌 추억으로 남겨졌다는 점입니다. 이제 누구에게 라 도 신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당당해졌습니다.
길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은 나의 인생의 시간을 계속 걸어야 하고, 걸을 수 있는 두 다리와 체력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길이 나를 받쳐줘 내가 공기처럼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떠받쳐주셔서 홍해바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홍해대전이 신과 인간의 싸움이었고, 당연히 신이 승리하신 것처럼 나를 대신해서 내게 닥칠 모든 적들과 문제들, 내 내면의 나약함까지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실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나는 계속 걸을 뿐입니다.
*4개월간 매주 수/금요일 연재한 '다시, 제주올레길' 27개의 연작 글을 끝맺고자 합니다. 밤안개의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저의 글이 제주 섬(島)을 걷는 분들께 작은 지도, 또는 당분을 보충하는 에너지바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