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 올레길 (19코스)

홀로 걷는 제주 섬(島) 437km, 27개 코스

by 밤안개

제주의 꿈


바다 넘어 섬(島)이 있었네.

나 꿈을 찾아 이 섬에 들어왔다네.

저마다 밀물처럼 몰려왔다가는

썰물처럼 사라져 버릴

흔적조차 남지 않을 이 섬(島)에

나 꿈을 좇아 들어왔다네.


잔잔하던 바다가

어느 날 시커먼 파도와 바람으로

온몸을 뒤 흔든다 해도

나 이제 이에 맞서지 않으리.

풍랑(風浪)은 내 키우는 애견처럼

곧 잔잔해지리라

나는 곧 바다로 인해 더 안정되리라


나 바다 넘어 섬(島)이 있다는 것을

나 바다 넘어 꿈이 있다는 것을

여태 모르고 살아왔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니

내 안에 큰 섬(島)이

바다 위에 이렇게 아름답게 서있을 줄이야

나 그동안 몰랐다네.

나 그동안 정말 몰랐다네.

(2025. 7.11)

*상·하추자도 2개 코스의 배 승선권 구매를 못해서 먼저 19, 20코스를 걷습니다.


2025년 10월 2일 목요일

추자도를 횡단하는 2개 코스(18-1 / 18-2)를 마지막 일정으로 돌립니다. 제주항에서 추자도 가는 배는 하루에 두 번 있는데, 최근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로 인터넷 예매가 어려워져 배 승선권 발매를 못했습니다. 부득불, 추자도 일정을 뒤로 미루고 대신 오늘은 어제 18코스에 이어 19코스를 걷습니다.


도보자는 19코스 시작점 조천으로 갑니다. 협재에서 조천까지는 버스로만 2시간 15분이 걸리네요. 초반에 진행했던 방식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동쪽으로 이동합니다. 제주 방면 202번 버스가 4분 후 도착예정입니다. “부엔까미노. 이 길 위에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08시 35분, 조천만세동산 앞에 도착했습니다. 올레 19코스를 시작합니다.

조천만세동산은 제주의 3대 항일운동 중 하나인 조천만세운동이 전개되던 곳입니다. 이곳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추모하고, 평화를 염원하기 위한 '애국선열추모탑'과, 만세운동의 뜻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진 '3.1 독립운동기념탑'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출출하네요. 아내가 싸준 맛있는 사과와 오메기 떡으로 체력을 보충합니다.


관곶(3.4km)

이곳은 제주에서 해남 땅 끝 마을과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83km) 조천관 시대에 조천포구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곶(串)이라는 뜻으로 ‘관곶’이라 불리고 있으며, 제주 울돌목이라 할 만큼 지나가던 배가 뒤집힐 정도로 파도가 거센 곳이기도 합니다.


이 수평선 끝에 제가 떠나온 땅이 있습니다. 저 너머 어머니, 동생, 친구들이 있겠지요. 해변은 참 아름답습니다. 하늘과 바다는 경계를 풀고 서로를 포옹하고 있네요. 일몰이 아름다운 이곳엔 많은 사람들이 바다 위에서 삼각대를 놓고, 인생 삿을 찍는다고 하네요. 아내랑 와야 할 포터 존 하나를 추가합니다.


아름답고, 정적인 마을 신흥리에서 잠시 쉬어 갑니다. 지금은 폐교가 된 이 신흥 초등학교에서 어린 시절 함께 했던 동무들을 생각해 봅니다. 4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애들은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요. 청년, 중년이 되고, 이젠 자녀들 결혼까지 시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아이도 있을 텐데... 그들이 보고 싶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유년의 친구들 동*, 용*, 덕* 모두 보고 싶습니다.


함덕해수욕장

제주 오면 저희 부부가 즐겨가던 함덕을 향해 갑니다. 우리가 묵던 유탑 유블레스호텔과 스타벅스가 멀리 보입니다. 저기 숙박하면서도 제가 있는 여기까지는 와 보지도 않았었군요. 걷는 사람만이 멀리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함덕해수욕장에는 여유 있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에메랄드빛 해안과 금빛 모래, 현무암 바위에 초록 풀... 모든 이들이 쉬고 싶어 하는 파라다이스의 모습을 갖고 있는 곳, 천국해변 함덕입니다


서우봉

협재해수욕장을 넉넉히 내려다보고 있는 언덕 위로 올라갑니다. 서우봉입니다. 이 오름은 살찐 소가 뭍으로 기어오르는 듯해서 예로부터 덕산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동쪽 기슭에는 일본군이 파놓은 21개의 굴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 산책로는 함덕리 이장과 청년들이 2003년부터 2년간 낫과 호미만으로 직접 만든 길이였네요. 경사가 60도 정도 되는 오르막을 10분간 올라왔습니다. 비 오는 듯 땀이 납니다. 길은 갈림길에서 정상 오르는 방향 옆으로 빠져내려와 내리막으로 내려가네요. "휴~ 살았네요!"


도보자는 이제 산을 내려와서 북촌리에 있는 해동포구를 향해 갑니다. 일제는 서우봉 둘레 암벽에 또 몹쓸 짓을 했네요. 서우봉 저쪽의 화려한 함덕이 있다면, 이편엔 쓸쓸한 해동포구가 있습니다. 인생의 명암을 보게 되는 것 같아서 씁쓸합니다.


너븐숭이 4.3 기념관

1949년 1월 17일, 마을에 있었던 불가항력의 남녀노소 3백여 명이 한 날 한 시에 희생되었습니다.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희생을 가져온 북촌리 주민학살사건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동·서쪽 들과 밭에서 자행되었습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떠나는 너븐숭이 4.3 기념관 추모관에서 잠시 기도합니다. '하나님, 무고하게 죽어간 이들의 영혼을 굽어 살펴주시고, 다시는 이 땅에 이와 같은 잔혹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옵소서.'


13시 04분, 너븐숭이 4.3 기념관에서 상영해 주는 동영상 관람으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속보로 조천읍 북촌리를 빠져나와 구좌읍 동복리로 들어섭니다. 다리 근육이 땅겨오고, 발바닥에서 불이 납니다. 동복리 마을 운동장을 향해 비탈길을 올라왔습니다. 사람하나 없는 긴 오르막길입니다. 중간스탬프 찍는 곳을 통과해서, 동복리의 또 다른 경로 '벌러진 동산'을 향해 속도를 내 걸어 나갑니다.


벌러진 동산

두 마을로 갈라진 곳, 혹은 넓은 바위가 번개에 맞아 벌어진 곳이라고 하여 ‘벌러진 동산’이라고 불립니다. 나무가 우거져 있고,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넓은 공터가 있으며, 아름다운 옛길이 남아 있습니다.

숲길 그림자가 움직입니다. 올려다보니 풍차의 바람개비입니다. 숲은 바람개비가 바람을 선사해서 그런지 시원합니다. 걷기 좋은 길 위에 박노해 시인의 문장 하나가 비수처럼 가슴에 꽂히네요.


‘나에게는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


‘나는 지금 나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14시 50분, 드디어 오늘 최종 목적지 김녕에 도착했습니다. 조천에서 08시 35분 출발했으니까 6시간 15분 걸렸네요. 만만치 않은 거리였습니다.


이 19코스를 걷기 위해 차로 이동하는 시간만 5시간이 걸렸습니다. 거기다 이 코스는 19km가 넘는 장거리 코스라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서우봉과, 구좌 동복리 언덕길 외에는 대부분 평지라서 버틸 만했습니다. 종점 김녕에는 식사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바로 버스로 협재로 이동 중입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네요. 생수로 한방 먹입니다.


오늘 걸었던 것들을 되돌아봅니다.

너븐숭이 4.3 기념관에는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시간도 없었을뿐더러 슬퍼서 기념관 주변의 작은 무덤은 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이렇듯 잔인할 수 있었을까요? 북촌리 주민들은 그 사건 이후 말을 잃었다고 합니다. 말을 할 수 없었던 '실어증'에 빠졌던 것이지요. 그러다 터져 나온 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아이고'입니다. 이 '아이고'라는 설움의 표현조차 감시당국의 표적이 되었다고 합니다. 슬픈 역사, 슬픈 제주는 누가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단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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