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는 제주 섬(島) 437km, 27개 코스
한창 무덥던 2025년 여름, 나는 오십 평생에 가장 스펙터클한 때를 보냈습니다. 성산읍 시흥리에서 올레 길을 시계방향으로 걷기 시작해서 섬(島)의 남쪽 끝을 지나 서쪽 한림을 거쳐 북쪽 함덕, 조천을 통과하고, 오늘 드디어 올레길 마지막 코스 <하도~종달> 코스를 걷습니다. 총 437km, 21개 구간, 27코스의 섬(島) 걷기가 오늘로써 완주(完走)됩니다.
2018년 나는 스페인 산티아고순례길(사리아 -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성당) 120km를 걸으며 제주 올레 길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섬(島)을 여기저기를 걸으며, 나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생각 밖에 할 게 없었습니다. 집에 들어올 때까지 혼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왜 난 그렇게 했을까?' 하다가 '그럼 난 뭐 하며 살아야 하나' 하기도 했고, '나는 그들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가?' 하다가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났고, 지금 내 나이보다 먼저 가신 삼촌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길은 내가 그동안 '다음에' 하고 미루던 생각들을 떠올리거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제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길을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때라는 사실을.
2025년 10월 17일 금요일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오늘의 시작점 '하도리 제주해녀박물관'을 향해 갑니다. 버스로만 3시간 거리입니다. 오늘 아침 협재 바다는 거친 파도로 도보자를 맞이합니다. "인생은 순탄치만은 않아! 힘내, 마지막까지 파이팅!" 하고 응원해 주는 듯합니다.
09시 36분, 올레 21코스 시작점 제주해녀박물관 앞에 도착했습니다. 마지막 제주 올레 길을 걷습니다.
낯물밭길
'낯물'은 면수동의 옛 이름이며, 도보자는 면수동 마을회관을 지나고 있습니다. 마을회관 앞에 쭉 앉아계신 노인 분들이 낯선 도보자를 의아하게 쳐다보시네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갑니다.
밭담길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지나갑니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입니다. 일꾼들이 일하러 밭으로 향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네요. 누군가의 손으로 토지가 경작되고 있었음을 잠깐 잊고 살았습니다.
고이화(高利花) 해녀(海女) 생가(生家)
이렇게 굴곡진 삶을 사신 분도 계시네요. 숙명의 해녀 인생입니다. 고이화해녀의 생가는 현재 제주살이 렌트 중인 것 같습니다. 돌비석 아래 연락처가 적혀 있습니다.
10시 30분, 가져온 간식을 풉니다. 비스킷과 소시지입니다. 아쉽게도 집에 사과가 떨어져서 오늘은 못 가지고 나왔습니다. 한림장 서는 날이 손꼽아 기다려지네요.
별방진
별방진은 조선시대의 역사적인 성곽입니다. 1974년 4월 3일 제주도의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된 이곳은 제주 동부지역 최대의 군사기지였으며, 고려시대부터 동서해안에 성을 쌓아 군인들을 주둔시켜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도보자는 마을을 지나 바다를 향해 걷고 있습니다. 멀리서 파도소리가 들려옵니다.
참 아름다운 하도 포구입니다. 중간 스탬프 찍는 함도 참 멋지네요. 한 여성 올레 꾼이 근처에서 연실 사진을 찍길래, "참 아름답네요!" 했더니, 당황해하네요. 외국인입니다. "This is very Beautiful"이라 바꿔 말합니다. "Oh yes"하고 답해주네요. 이 아름다움 자연 앞에 언어는 그냥 소모품일 뿐입니다. 바다 앞에 작은 인간일 뿐입니다.
토끼섬
제주도 구좌읍 하도리에 위치한 '토끼섬’은 그 이름처럼 토끼를 닮은 모양의 작은 섬입니다. 이 섬은 한여름에 하얀 문주란 꽃이 온 섬을 뒤덮을 때 토끼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원래는 '난들여’라고 불렸습니다.
해녀동상을 바라봅니다. 그녀들 모습이 참 해맑습니다. 힘들고 고된 그녀들의 삶을 비교해 보면 제 자아는 점점 더 작아지네요. 사람이 모두 떠난 하도 해수욕장은 쓸쓸하기만 합니다. 화려한 영욕의 날들은 언젠가 저렇게 빈 것으로 남겠지요.
11시 50분, 6.6km 부근 도보자는 해안 길을 떠나 한라산 방면으로 올라갑니다. 최종 목적지까지 3.9km 남았습니다. 길을 아껴 걷습니다. 멋진 리조트 크리스마스리조트입니다.
지미봉
가파르지만 길지 않아서 20분 정도면 정상에 오르는 지미봉 초입에 와 있습니다. 산은 165m 높이의 야트막합니다. 윽! 경사 45도가 넘는 오르막을 헉헉 거리며 올라왔습니다. 사방이 탁 트인 전망은 모든 것을 잊게 만듭니다. 사람 숨결이 느껴지는 밭이 있고, 마을과, 하우스, 바다와 구름 그 모든 것이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화입니다. 왼쪽 섬이 우도고, 중간에 오름은 성산일출봉, 맨 오른쪽은 식산봉입니다.
산을 내려왔습니다. 오르내리는데 40분 걸렸네요. 생각보다 내리막이 길고, 미끄럽습니다. 두 번 정도 넘어질 뻔했습니다. 도보자는 다시 바다를 향해 갑니다. 최종 목적지 종달까지 1.5km 남았습니다. 현재시간 12시 47분입니다. 눈앞에 성산일출봉이 서있습니다.
13시 36분, 최종목적지 종달 마당에 도착했습니다. 제주해녀박물관을 09시 36분 출발했으니까 총 4시간이 걸렸습니다. 21코스를 마무리하고 버스를 타기 위해 18분을 걸어왔는데 낯익은 장소입니다. ‘종달초등학교’ 네요. 1코스 때 지나던 곳입니다. ‘여기 어디서 식사했었는데 ’ 하고 국숫집이 생각났습니다. 고기국수에 도전했던 그 집입니다. 오늘 첫 끼니도 그 국숫집에서 먹습니다. 고기국수대신 멸치국수와 해물파전을 시켰습니다. 꿀맛이네요. 식사하는데 갑자기 울컥해집니다. 음식을 준비한 분의 제주삶이 어땠을까 생각하다 갑자기 마음이 무너집니다. 올레 길 걷기가 끝났다는 생각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 오버랩되면서 감동이 되었나 봅니다. 음식을 준비하신 삼촌이 말해도 잘 못 알아들으신 것 같아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10km의 짧은 올레 21코스는 전형적인 올레 길의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낯물밭길을 따듯한 마음으로 걷다 보면 멀리 파도소리로 바다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얼마 안 가서 힘찬 하도 포구를 만나게 됩니다. 흰 포말을 터트리며 파도는 검은 바위를 사납게 내리 칩니다. 바다의 강한 바람은 온몸에 쌓인 고뇌를 다 날리고,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어느 정도 정신이 차려지면 길은 산으로 안내합니다. 가파르고, 숨을 헉헉거리게 한 지미봉에서 뜻밖에 사람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발밑으로 반듯하고 잘 정비된 농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또한 경이롭게 바라보며 고개를 올려보면 낯익은 섬과 오름이 나타납니다. '우도'와 '성산일출봉'입니다. '소의 섬'은 이제 제주 동쪽의 명소 '성산일출봉'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오누이가 된 섬과 산, 올레 길의 동쪽을 걷는 내내 나침반 역할을 해준 이 오누이가 결국 21개 올레 코스의 처음 시작이자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감동을 주는 길, 제주올레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