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친구들과 산에 가면 고즈넉한 사찰에 마음을 뺏기곤 했다. 대웅전에 가선 엉터리로 절도 하고 시주도 하며 불교 신자 흉내를 내곤 했다. 스님의 염불소리도 향냄새도 평화로웠으며 그런 절이 좋았다.
언니가 결혼하고 엄마, 언니와 나 우리 셋은 자주 절에 갔다. 난임으로 힘들었던 언니는 동네 분을 따라 절에 다니면서 임신을 했다. 그리하여 절은 언니의 일상뿐 아니라 엄마와 동생인 내 삶에도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보니 시부모님은 천주교 신자셨다. 하지만 시댁의 종교 탄압 같은 건 없었다. 시부모님 세례명은 마리아, 요셉이셨고, 막내며느리의 종교도 존중해주셨다.
어렵게 4년 만에 아이를 갖게 되자 일요일마다 언니가 다니는 절에 함께 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안성에 있는 비구니 스님 두 분이 계신 아담한 절이었다. 주지스님의 법문이 있기 전 다른 스님 한 분은 보살님들에게 참선과 요가를 가르쳐 주셨다. 임신기간 동안 일요일마다 명상과 요가로 뱃속의 아기와 이야기를 나눈 그 시간은 우리 모녀에겐 축복의 시간이었다.두 스님은 안성에 다문화 가정과 조손가정의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딸아이가 4살 되던 해에 스님들께 은혜를 갚고자 공부방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영원히 내 곁에 계실 것 같던 엄마가 돌아가셨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로 하루하루 살던 때, 엄마가 도대체 어디로 가셨는지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 답이 나올 것 같아 100권을 목표로 독서를 시작했다. 시작은 부처님에 관한 책이나 스님들의 명상집이었다. 처음에는 그다음 책을 고르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읽다 보면 그 책이 다음 읽을 책을 점지해 주는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내 지식수준이나 관심사로 그런 책을 고를 리 만무한데 내 손엔 이상한(?) 책이 번번이 쥐어졌기 때문이다. 백 권 프로젝트 과정의 중후반으로 갈수록 기독교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밀쳐내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면서 내 안에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경계가 모호해짐을 느꼈다.
그중에서 가장 이상한 책은 로나 번의 ‘수호천사(Angels in my hair, 이레 2011)’라는 책이었다. 류 시화 시인이 번역한 책으로 아일랜드에 사는 가톨릭 신자인 로나 번은 지적장애와 난독증이 있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수호천사들을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가 중년이 되자 그녀의 수호천사는 로나의 능력에 관하여, 천사들의 존재에 대하여 책을 쓸 것을 권유해서 세상 밖으로 나온 책이 바로 ‘수호천사’다. 감동을 나누고자 절판된 ‘수호천사’를 중고매장에서 몇십 권을 사서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그 책을 읽은 친구들의 반응은 ‘이상하다’ ‘무당 같다’ ‘이런 걸 믿느냐’는 등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음이 갔다. 그뿐만 아니라 그 책으로 내 삶을 이해하는 설명서가내 손에 쥐어진 느낌이었다. 살면서 죽음을 모면했던 순간들이 있었고, 아이를 키우면서도 불가사의한 일들이 몇 번 있었는데 그것들이 한꺼번에 해석이 되면서 위험한 순간마다 혼자가 아닌 수호천사와 함께였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뒤로 매 순간 수호천사와 대화하고 기도하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에겐 말할 수 없었다.
딸아이가 7살이 되자 주변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딸아이 친구 엄마들을 만나도, 내가 새로 갖게 된 모임에 나가도 가톨릭 신자가 많았고, 처음 놀러 간 집 벽엔 큰 십자가가 있었다. 그전에도 만나는 사람들 중에 가톨릭 신자가 있었을 텐데 유난히 그 해에는 자신의 종교를 밝히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같이 학습지 교사를 하다 결혼 후 미국으로 가신 동료 선생님을 몇 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신 건 알고 있었다. 여름 장맛비를 뚫고 만난 선생님이 처음으로 내게 한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길모 선생님 이제 성당 나가야겠다.”
5년 만에 만나자마자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신 것도 신기하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아, 성당에 가야 하는구나’하고 생각했다. 뭔가에 홀린 듯 선생님의 말씀에 그 어떤 거부반응이나 의문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뒤 선생님과의 일화는 곧 잊혔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영어를 가르쳐야겠다는 비현실적인(?) 꿈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12월 어느 날 세 식구가 함께 근처 도서관에 갔다. 거기서 ‘엄마표 영어’에 관한 책들을 훑어보다 그중에 한 권을 읽어나갔다. 저자는 엄마표 영어의 성공 비결을 열 가지를 소개했는데 마지막에는 가톨릭이라는 종교 안에서 아이를 키우고 교육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그 단락을 읽고 이렇게 속으로 외쳤다. ‘제가 무릎 꿇겠습니다.’ 그런 다음 도서관 밖으로 나가 집 근처 성당에 전화해서 성당을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6개월을 기다려 6월부터 12월까지 새 신자 교육을 받고 나는 하느님의 자녀 ‘루치아’가 되었다.
6개월의 새 신자 교육 기간 동안 드렸던 미사에서 많은 눈물을 토해냈다. ‘주님의 기도’에 있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 부분에서 가족을 돌보지 않고 술과 폭력으로 세월을 보내도 미안한 기색조차 없던 대책 없는 아버지가 아닌 어린 시절부터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시간까지 나의 눈높이에 맞게 당신에게 이르는 길을 보여주시고 그때그때마다 내게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셨으며 ‘수호천사’라는 존재를 보내시어 그 길을 밝혀 주신 진정한 사랑의 아버지가 내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랑받고 있었고 그 큰 사랑 안에 있었다.
루치아가 된 지 5년째다. 미사에 빠지지 않는 신심 깊은 신자도, 묵주가 닳도록 묵주 기도하는 신자도, 성당 봉사에 열혈인 신자도 아닌 세상일에 바쁜, 몸 사리는 신자다. 하지만 겨자씨만 한 믿음이지만 언젠가는 많은 이들이 들어와 쉴 수 있는 믿음의 푸르른 숲을 가꾸는 루치아가 되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