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도리를 벗어던져 불태워야 할 때: 잠복소

by 니모

요맘때쯤이면 나무가 두르고 있던 옷, 잠복소를 벗겨 태웠다.

어릴 적 순수했던 나는, 나무가 춥지 않도록 볏짚으로 목도리를 만들어준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날이 따뜻해지면 더 이상 목도리가 필요 없으니깐, 목도리를 벗겨주는 거라 생각했다.


나무 기둥에 짚을 둘러 만든 잠복소는 벌레들을 유인한다. 잠복소는 해충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게 해주는 안식처 역할을 한다. 아니, 정확히는 해충들을 유인하는 미끼 역할을 한다.

해충들이 추위를 피해 짚단 속으로 모여들면, 봄이 오기 전에 잠복소를 태워 해충을 일망타진한다.


날이 따뜻해지기 전에 잠복소를 태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무를 지키기 위해 두른 잠복소가 한순간에 해충 인큐베이터로 변해버릴 수 있다.




사람들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기 방어라는 목도리를 두른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나 기억을 무의식 속에 가둬버린다.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이나 결핍을 남의 것으로 떠넘기거나, 마음이 들킬까 무서워 속마음과 정 반대로 행동하기도 한다.


자기 방어는 마음의 상처나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두르는 볏짚이다.

평생 자기 방어 속에서 산다는 건 내가 직접 해충을 기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때가 되면, 자기 방어에서 벗어던져 태워버려야 한다.


물론 모든 자기 방어가 다 나쁘다,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방어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혹독한 추위가 가시고 봄이 오면, 습관적으로 두르고 있던 방어기제는 벗어도 된다는 것이다.



나는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

과거형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 아직도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때는 친구라 생각했던 가해자였기에 나는 그때 이후로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마음의 벽을 높게 쳐놓고, 나에게 다가오려는 다정한 사람들, 따뜻한 위로를 다 튕겨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둘렀던 목도리가 나를 더 시리게 만들었다.



지금의 나는 목도리를 두르지 않아도 될 정도의 따뜻한 봄에 살고 있다.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해 주는 남편을 만났고,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응원해 주는 친구도 있다.


그러나 나는 방어기제라는 목도리를 완전히 벗어버리진 못했다.


새로운 환경에 처하거나, 가해자와 비슷한 생김새, 목소리 톤, 말투 등을 만나면

다시 꽁꽁 목도리를 여민다.


그때처럼 나를 괴롭히는 가해자가 이제는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안다.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반사적으로 방어기제가 튀어나올 때가 있다.




이제는 꽁꽁 여몄던 목도리를 풀어도 될 때다.

아니, 목도리를 벗어던져버려야 할 때다.


나를 지키려고 둘렀던 잠복소가

나를 해하는 해충 양성소가 되어버리기 전에

벗어던져 불태워버려야 한다.




물론 살아가다 보면 또 언젠가는 짚단을 두르는 날도 있을 것이다.

다만, 봄이 오면 낡은 잠복소를 미련 없이 풀어헤칠 줄 아는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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