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보냈던 그날 내가 태어나 가장 서럽게 그리고 유일하게 꺼억꺼억 소리 내며 울었던 날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아이를 시누이집으로 데리고 간다고 했다. 아이는 오랜만에 고모집에 간다며 들 떠 있었고, 엄마가 아파 본인을 돌 볼 수 없어 고모집으로 간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그날 마지막 아이의 인사는 “엄마, 고모집에서 몇 일만 놀다가 올게” 였다.
그렇게 아이를 보내고 나는 불꺼진 방에서 하염 없이 없엇다. 하도 소리내어 울어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 였다. 가슴이 찢어지고 세상이 끝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몇 시간 후 걸려온 전화는 나를 또 힘겹게 만들었다.
시누와 남편의 전화였다. 집을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아이와 함께 살 때야 함께 지내라고 준 거지만, 이제 내가 혼자 이니 집을 내 놓으라는 것이다.
이 무슨 어이없는 말인다. 우리집은 LH에서 지원해 주는 신혼부부전세대출로 들어온 집이었다. 그것도 원래 살 던 동네에서 이사를 하려 했으나 지원금 보다 전세금이 더 비싸고 부대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월세도 있었다. 그래서 포기 했었는데 남편이 무조건 동생 동네로 가서 함께 살아야 한다며 입원중에 급하게 알아보고 이사 온 집이었다. 그리고 LH에서 지원해주는 금액 외 보증금은 내가 살던집의 보증금을 빼서 넣은 돈이었다. 그래서 처음 이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변호사에게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쨌든 남편이 유책배우자이기 때문에 위자료를 받거나 집을 받으라고 말이다. 금액상 비슷 할 꺼라고 말이다. 하지만, 난 그말은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뒤늦게 집을 내 놓으라며 끝까지 치사하게 나오는 통에 그럼 딴년 만나 결혼 한다하니 위자료를 달라고 하니 아무말도 없었다. 그렇게 한 단락 마무리 되나 싶었다.
그리고 몇 일 후 내가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가정법원에 이혼접수를 하러 갔다. 이혼 신청 후 면담 같은게 있었다. 그러면서 왜 이혼을 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상황에 대한 질의응답이 있었다. 그곳에서의 첫 질문은 “아이가 어린데 왜 아빠가 양육하시는 건가요?”라는 질문이었다. 질문 하시는 분도 여자분이셨는데 당연히 엄마가 키워야지 왜 아빠가 키워 라는 뤼앙스였다. 그래서 내가 수술을 앞두고 있고 경제적인 부분에서 아빠가 나을 것 같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남편이 아이가 고모네에서 지금 함께 지내고 있는데 너무 잘 지내고 있다며 미술도 시작하고 즐겁게 지낸 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아이 미술용품을 좀 사서 줘도 되냐고 하니 그러라고 하여 크레파스, 물감 등 케이스에 담긴 미술도구를 남편에게 사서 주었었다. 그날 시누에게서 문자가 왔다.
“자식 버린 애미 주제에 뭐가 잘 났다고 이런걸 보내? 애미면 아이만 줘도 감사하다고 살아야지 뭐가 잘 났다고 양육비까지 내놓으라고 해. 아이는 내가 잘 키울 꺼니까 만날 생각도 하지 말고 딴 놈 만나서 이 동네에서 나가. ” 라는 내용이었다.
시누도 엄마인데, 우리애와 불가 3개월밖에 차이 나지 않는 딸이 있는데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엄마면 자식 버린게 되는 것이고, 아빠는 집나가 애 한테 전화 한통 안 해도 괜찮다는 것인가. 이런 모순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 말이다. 원래도 시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리 좋을 것도 없었을뿐더러 시부모님이 안 계셔서 였을까. 아니면 결혼생활을 먼저 해보아서 였을까. 내 느낌에는 시부모님 역할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와는 전혀 반대의 성격에 내가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같은 여자인데 그렇게 꼭 표현을 했어야 할까.
사실, 나 역시도 자식 버린 애미라는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 했다. 내 건강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임신때부터 아프기 시작한 아이를 치료센터에 그렇게 쫓아 다니고 틱까지 온 상태에서 모든 걸 내려 놓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이를 남편에게 보냈다기 보다는 내가 아이를 놓았다는 죄책감이 많았다. 그랬기에 시누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 했는지도 모른다.
사연이 어떻게 되었고, 이유가 어찌 되었건 나는 여전히 자식버린 애미의 굴레속에 갇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