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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Oct 04. 2021

1일1드로잉

쓰고 싶은 책

#80일차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시장에서 사 온 재료를 손질해 술과 함께 안주로 파는 일을 하셨다. 밤에 장사하고 새벽에 들어와 잠을 조금 주무신 뒤 오전 느지막이 시장에 가셨다. 장바구니 안에 어떤 재료는 수분이 마르지 않도록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가져오셨다. 매일 정오 무렵이면 부모님은 밤 장사에 쓸 각종 내장과 생선들을 마당에서 손질하셨다. 남동생과 나는 마루에 나란히 걸터앉아 두 다리를 흔들고 흘러내리는 콧물을 들이마시며 부모님이 하는 일을 구경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콧물이 줄줄 흘렀는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먹으라고 사 온 아이스크림이나 소시지, 엿 같은 간식을 한 손에 야무지게 들고 핥아먹거나 빨아먹거나 씹어 먹으면서 말이다.


어느 날 식재료에 말려 딸려 온 젖은 신문 한 조각이 눈에 띄었다. 선데이 서울 같은 스포츠 신문이었다. 어른들이 읽는 연재소설이 실린 조각이었는데 내용이 무척 야했다. 그런 류의 이야기를 처음 본 나는 가슴이 콩닥거려서 몸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그걸 읽는 내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켰을까 봐 순간 두리번거렸다. 신문 조각을 낚아채듯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 방구석에 등을 기대고 종이를 작게 접어서 조금씩 펴가며 다시 읽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흡입력만큼은 최고였다. 답답했던 것은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재소설은 일주일에 한 번 실려서 다음 이야기를 보려면 꼬박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문제는 일주일 후 아버지의 시장바구니 안에 생선이 그 신문에 말려서 담겨올 가능성이 희박했다.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던 나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우리 집과 아버지 일하는 곳 사이에 신문 가판대가 있었다. 가판대 앞에는 검은색으로 된 신문이 이름만 보이는 간격으로 키를 달리하여 전시되어 있었다. 유독 스포츠 신문만 제목이 빨간색으로 인쇄되어 있어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컴컴한 가판대 안에는 백발에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가 졸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 오백 원짜리와 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손으로 굴리며 가판대 주변을 한참 동안 서성였다. 신문을 달라고 어떻게 말하지? 저 신문은 어른들이 보는 건데 내가 사면 의심 사는 거 아냐? 쪼끄만 게 보려고 했다고 혼날까? 야한 이야기를 궁금해한다는 죄책감, 착한 어린이는 그러면 안된다는 강박감에 포기하고 돌아섰다.


다음 이야기가 읽고 싶어 미칠 것 같은 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 부러울 만한 책을 쓰고 싶다. 알베르 까뮈가 스승 장 그르니에의 책 <섬>에 붙인 그 유명한 헌사가 생각난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다시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로맨스 소설을 쓰고 싶은 건 아니다. 문학이 될지 에세이가 될지 모르겠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글, 평범한 사람에게서 마블 시리즈의 주인공만큼 매력적인 면을 찾아주는 글, 공책에 따로 필사해두고 싶은 글, 알라딘 중고매장에 팔려 나오지 않고 이삿짐에 늘 따라다니는 책,  친구와 나누는 이야기나 일기에, 그의 삶에 종종 끼어드는 책을 쓰고 싶다.


그래서 이렇게 매일 조금씩 이야기를 굴려 구슬을 만드는 중이다. 구슬을 서 말 정도 만들어 쌓아 놓으면 다듬고 정리할 때 이야기 부자가 된 기분이겠지? 바늘과 실로 꿰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고 있다. 아마도 내가 책을 낸다면 알려져야 하는데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글, 내가 써야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글은 마음대로 써도 무방하지만 책은 다르다. 책은 작든 크든 사회적 책무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숙제의 힘으로 움직여 내가 되었다고 할 만큼 피동적으로 살아왔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안 쓰겠구나 했을 때 그 사명감을 엔진으로 책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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