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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land Jan 22. 2024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의 단편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읽었다. 살아가면서 만날 수 있는 낯선 사람들 또한 이해하고 싶어 하는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소설집이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곱씹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서 계속해서 읽게 된다. 그중 인상 깊었던 소설은 표제작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와 <일 년>이다. 두 소설 모두 서로의 존재로 인해 빛을 발견하는 두 여성의 이야기다.


표제작 이기도 한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는 스물일곱의 대학교 편입생인 화자가 영문학과 전공 수업을 처음 맡게 된 강사의 수업을 들으며 관계가 이어진다. 언젠가 자신 또한 대학원에 가 학업을 이어가고 싶은 편입생 화자는 그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영어는 나와 관계가 없는 말이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쓰던 말이 아니었다. 내게 상처를 줬던 말이 아니었다.’고 에세이집에 서술하며 페어퍼백 영어소설을 읽는 강사의 모습. 화자는 그녀가 공부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순간에 대해 쓴 글 또한 기억한다. ‘퇴근해 책상 앞에 앉아 책에 밑줄을 긋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순간에 투명 망토를 두른 것 같았다고 그녀는 썼다.’ 화자가 가고 싶은 길을 먼저 간 그녀가 화자에게는 ‘빛’ 같았다. 그녀에게 품은 동경과 애착, 그리고 작은 오해의 순간으로 멀어진 관계와 상관없이 그녀가 먼저 걸어간 길을 따라가며 화자는 여전히 그녀의 ‘빛’을 찾는다. 하지만 그녀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어느새 빛은 사라진다. 어둠 속에서 잠깐 숨을 멈추고 그녀가 품었던 빛을 떠올리는 순간을, 나는 좋아한다.


세 번째 단편인 < 년> 엔도  여자가 나온다. 삼 년 차 사원이던 그녀와   계약 인턴이던 다희는 동갑이다. 그녀는 운전면허가 없는 다희에게 카풀을 해주게 된다. 인안대교를 건너는 출퇴근 길에 그녀의 옆자리에서 다희는 준비해 온 귤을  그녀의 손바닥에 올려주며 허물없이 대화를 건넨다. 일몰 전후의 붉은빛으로 때로는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펼쳐진 대교를 건너면서 그들은 회사에서의 사무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사람  사람으로서 관계를 맺는다. 그녀는 함께 있으면서 비로소 자신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받아들일  있었다고 느낀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직위와 입장으로 인해 각자 서로 다른 힘든 시간을 통과하게 되며 그들의 관계에 어쩔  없는 균열이 생긴다. 일 년 계약이 끝난 , 더 이상 연락하지 않던 다희를 팔 년이 지나 우연히 병원에서 마주친 그녀는 다희에게도 차에서의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기를 바란다.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 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라고 말하며 사라진  시절을 끊임없이 떠올려온 그녀의 마음을, 나는 좋아한다.


<일 년>에서 인상 깊었던 문장이 있다. “종종 문병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 사람들은 다정했고, 그녀가 겪은 고통을 위로했다. 그녀는 잠시였지만 그들에게 정성껏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다. 그 느낌은 수술 후 그녀의 혈관을 흐르던 모르핀처럼 부드럽고 달았고, 그녀는 덜 아플 수 있었다. 그들이 한때 누구보다도 그녀를 아프게 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었지만.” 상처받은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사람들을 품으려는 그녀의 글을 어떻게 정성껏 읽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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