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낯설어도, 익히고 나면 이전의 삶은 상상할 수 없어
"기술의 발전이 삶을 뒤집어 놓는다." 명제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었는데, 요즘 들어 그것을 한 층 더 확고히 믿게 된다. 한 십 년 전에 '유비쿼터스' 어쩌고 하는 말이 대유행했던 게 기억난다. 언제 어디서나 소유한 기기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어내는 시대가 가까웠음을 논술로 써내는 게 당시 수험생들 사이에서 필수과제였는데, 확실히 느껴지는 바는 아니었다. 기기는 용도별로 다 쪼개 써야 했고, 무선인터넷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으니까. 롤리팝 폴더폰과 아이리버 엠피쓰리와 딕플 전자사전을 따로 썼던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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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家 고동진 대감댁에서 서포터스 활동해서 얻어낸 '갤럭시 노트 9'와 '기어 아이콘 X'는 뚱뚱보의 건강관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특히 핸드폰보다 무선 블루투스 이어폰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이어폰 자체에 터치 인식 기능이 있는데, 한 번 두들기면 정지, 두 번 따닥 두들기면 노래를 넘길 수 있다. 위로 쓸면 볼륨을 높이고 아래로 쓸면 볼륨을 낮출 수 있다.
뛸 때 핸드폰 열면 거추장스럽다. 그래서 운동할 때 쓸모 있다.
또 대놓고 피트니스 관리 기능을 강조한다. 비활성화시키기 잔에 계속 알람이 뜬다.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오른쪽 귀를 두들기면, 영화 <HER>의 싸만싸만큼 매혹적이진 않지만, 또박또박 운동 상태를 체크해주는 기계 누나가 소환된다. 기계 누나가 시키는 대로 준비운동을 하고 한 시간 정도 달리면
잘하고 있어요! 심장이 뛰는 것과 숨을 내쉬는 걸 잘 느껴보세요.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라고 말을 건네기까지 한다.
운동 내역은 모두 헬스 앱에 저장되며, 간단한 건강관리 차트를 작성할 수 있다. 물 마신 횟수, 커피 마신 횟수를 기록할 수도 있고, 기록된 바를 토대로 계획도 세워준다. 체중과 나이를 고려한 운동 루틴을 제안한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천수를 누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특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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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러닝 크루 소모임이나 '컬러 미 레드'나 '하프 마라톤 대회'같은 게 인기를 끄는 건, 추측컨대 <나이키 런 클럽> 같은 애플리케이션의 힘이 크지 않나 싶다. 내 일찍이 <나이키 런 클럽>의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2년쯤 쓰자 배터리가 슬슬 맛이 간 덕에(현대 스마트폰은 성능 때문에 바꾸는 게 아니라 배터리의 조루(...) 화化 탓이다. 배터리 기술의 혁신은 아직 요원하다 하니...) 차일피일 미루다 이번에 새로 깔아봤다.
요즘 들어 달리기 애플리케이션으로 운동기록을 꾸준히 메모하는 지인들의 실사용도 내 호기심을 크게 촉진했다.
실제로 써보니 참으로 기똥차며 영리하다. 무엇보다 도전 동기를 자극한다. GPS와 구글맵을 연계해 내가 어딜 어느 속도로 걷고 뛰었는지 기록해두는데 생각보다 정확했다. 기록이 정확하니, 평소에 걷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 걷게 된다. 많이 걸으니 운동은 저절로 되는 것이고, 안 가본 길로 뛰어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그렇게 요즘 들어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이어폰에 시티팝 장르의 음악을 켜 둔 채 뜀걸음에 열심이게 됐다. 이건 무슨 운동이라 해야 하나. 시티 런city run이라는 이름을 붙여야겠다.
뜀뛰기 어플 켜고 달리면, 지리위치에 대한 물리적 실감이 활성화된다. 스마트폰은 품 안에 넣어두고 눈 앞에 보이는 풍경에 집중하는데, 내가 지금 어디에 서있는지 어렴풋이 느낀 것을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평소에 무시했던 길도 새롭게 보이고, 덕분에 가고 싶은 갈림길이 많아지는데 자연스레 재미난 길을 개척하게 된다. 뛰는 일 자체가 유희가 되는 것이다.
"오늘은 공중파 방송에서 본 옆 동네 로컬카페를 찍고 와볼까?" 집에서 위치를 확인해보니 대학교 뒷골목에 있는 재래시장이라고 한다. 최단거리를 목표로 열심히 뛰어가니, 약 4km. 오래된 주택가 담벼락을 타고 달리면 기묘한 풍경을 잇달아 만난다.
빈티지 타이포그래피를 쓰고 있는 기묘한 노포와 대문 똑똑 두들겨서 집 구경시켜달라 말하고 싶은 어느 단독주택과 어디선가 주워 들었던 옛 친구의 자취방과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았다는 집을 발견하게 된다.
"아! 운동은 의무가 아니라 유희가 되는구나. 유희가 습관으로 스며들길 소망해."
덕분에 모처럼 운동 욕에 불타 운동장비도 마련한다. 아웃렛에 가서 운동용 운동복(이라기엔 요즘 나오는 옷은 싹 다 쫀득쫀득 레깅스 핏이다.. 씨름선수형 하체인 나는 울상이 된다.)도 사고 운동화도 새로 빨아 신었고. 암밴드를 하나 마련할까 싶기도 했지만 아직 사치란 생각이 들어 참았다. 요즘엔 스포츠웨어도 디지털 디바이스 소지를 고려한 디자인으로 나오는 게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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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용화 단계에 접어든 신기술은 처음엔 낯설어도 익히고 나면 그 이전의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특히 나처럼 감각에 의존한 상상력이 익숙한 사람은 더더욱. 무선 이어폰에 맛 들이니, 유선 이어폰이 아무리 음질이 좋다 한 들, 엉킨 줄을 풀 생각에 문득 겁에 질려, 도로 집안 서랍에 놓게 된다. 무선 이어폰이 간헐적으로 수신이 끊어져도 유선에 비해 편리하단 점을 압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2년 전에 나온 핸드폰과 올해 하반기에 나온 핸드폰의 스펙은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배터리와 화면비율의 차이가 있다. 배터리가 오래가고 화면이 큰 신형 핸드폰을 쓰기 시작하니, 그래도 아직은 쓸만한 옛 기기를 유튜브 셔틀로만 쓰게 된다. 현대인이 금방 권태를 느끼는 건 모바일 기술이 이처럼 빠르게 발전하기 때문이겠다.
허나 사용자가 기술을 다스리려는 태도를 가져야지, 사용자가 모바일 기술에 종속되진 않아야 할 것이다. 스마트폰에 '스마트 smart'라는 이름이 붙은 건, 사실 사용자의 '스마트 smart'를 가늠하라는 뜻에서 지어진 건 아닐까. 스마트폰을 유튜브 셔틀이나, 단순 통신용 도로 쓰기엔, 잠재력이 너무 뛰어나다. 쓰는 사람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숨겨진 잠재력을 끄집어내려 애쓴다면, 스마트폰은 사람보다 든든한 조력 장치가 되지 않을까. 나는 SNS와 스마트폰이 없으면 가장 서운해할 헤비유저로서 매해 매달 쏟아져 나오는 신문물과 잘 사귀는 방식을 고민한다. 기왕에 사귄다면 그 녀석들과 피터팬의 팅커벨, 김고은의 공유, 유비 옆의 제갈공명 같은 느낌으로 사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