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소설적 재현시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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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옥씨의 핸드폰이 말썽이다. 희옥씨는 자꾸 전화가 엉뚱한 곳으로 걸리는 데다, 보조배터리 없이는 외출을 할 수 없다며 자꾸만 눈치를 준다. iOS를 쓰건 안드로이드를 쓰건 누구에게나 핸드폰은 주기적으로 말썽이다. 그 어떤 핸드폰을 쓰더라도 2년에 한 번은 말썽이다. 희옥씨의 말썽 많은 핸드폰을 진단하고 처분하는 것은 늘 나의 몫이다. 몇 해 전에 희옥씨가 약정이 남은 핸드폰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불공정한 핸드폰 약정관행은 시니어들에게 불리한 계약으로 덮어씌워지곤 하는데, 이 위협을 덜어내는 건 핸드폰 커뮤니티의 은어를 그럭저럭 해석할 줄 아는 각 가정의 자녀들의 몫이다. 나는 핸드폰의 세계가 부부의 세계만큼이나 복잡한 곳이라 확신하고 있으며, 이 세계는 희옥씨가 영원히 몰라도 될 세계라고 생각한다. 21세기의 참된 효도는 어쩌면 부모의 핸드폰 관리를 대행해 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핸드폰 약정이 모두 끝난 상태였고, 마침 공기계가 남아서 희옥씨에게 선뜻 핸드폰을 건넬 수 있었다. 그러나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동기화 옵션 때문에 희옥씨와 나의 데이터가 뒤죽박죽 섞여버렸다. 사진첩(나의 사진첩에는 1만장의 이미지가 남아있다.)과 연락처(영업을 하는 희옥씨의 연락처는 2000개다.)를 정리하는데 아주 혼쭐이 났다. 새로운 핸드폰을 부모님에게 인계한다는 것은 일종의 부동산 거래와 같아서, 방을 깔끔하게 비워줘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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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흐른 세월은 효도를 완성시킨다. 희옥씨의 손에 넘어간 '은하수7'은 쓰지도 않는 데이터와 잃어버린 기계의 할부값으로 얼룩진 약정기한을 무사히 끝냈고, 지금은 제한 없이 전화만 쓰면 장땡인 최저요금제로 갈아타 제 몫을 해내고 있다. 유심만 갈아끼면 희옥씨가 원하는 폰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자급제의 세계로 온 것이다. 아들 된 자로서 통신독립만세의 초석을 다져본다. 2020년의 희옥씨가 써야 할 핸드폰은 '은하수노트9'였다. 2년 전에 겪은 동기화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메신저 다이얼로그와 공인인증서까지 깔끔하게 이사를 마치고 희옥씨의 핸드폰 민원수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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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7'은 다시 내게 돌아왔다. 기기를 천천히 점검해본다. 희옥씨의 민원과는 달리 터치는 잘 됐고, 배터리는 확실히 문제가 많았다. 충전기만 잘 물려두면, 와이파이 터지는 세계에서 배경음 셔틀이나 유튜브 플레이어로서 만수무강하시리. 원래 나의 일부였으나, 희옥씨의 수족이었던 은하수7을 다시 나의 일부로 돌려야 한다. 희옥씨가 쓴 어플리케이션을 하나씩 지워낸다.
어라? 희옥씨는 정말이지 쓰는 어플만 썼나 보다. 희옥씨가 썼던 어플을 지워낼수록, 내가 이 폰을 썼을 시절의 인터페이스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핸드폰에 담긴 흔적을 문화재에 빗대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비유일까? 허나 은하수7에 남아있는 몇 가지 메모는 당시의 벌어진 사건과 정황을 제법 잘 기술하고 있었고, 터널 공사를 하다 발견됐다는 어느 고대왕조의 옛 터전처럼 우연히 발견됐다. 특히 결정적인 메모 하나가 발굴됐는데,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다.
러빙 빈센트, 빌 에반스. 강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 바다. 빛. 언니. 우리 언니. 가족 이야기. 크리스마스 캐롤. 크리스마스에 뭐 할 거? 농담웃음 가득한 사람과의 교제. 피아노를 쳤어요. 클래식 좋아.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어요?
2017.11.26 am.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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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옥씨와 핸드폰을 맞바꾸지 않았면, 메모는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메모가 연결한 기억도, 메모가 부활시킨 문답도 영영 소생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