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풀벌레 소리가 정겹다. 계절은 하루가 다르게 가을의 문턱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 같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무더위에 밤새 에어컨을 켜 두고 잠을 청해야 했었는데 자연의 이 변화가 신기할 따름이다. 이렇듯 선선한 바람이 불면 자연스레 떠 오르는 시구가 하나 있다.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로 시작되는 이 시는 내용은 몰라도 그냥 제목에서 확 끌려버리는 매력이 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글쎄, 나는 무엇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할까.
기도에도 종류가 있다. 무언가를 원하고 바라는 기도가 있고 지금의 상태를 감사해하는 기도가 있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기도를 할 때는 누군가를 향한 간절함이 느껴지지만 감사의 기도는 뭔지 모르게 평온함이 깃들어 있다. 감사기도에 있어 간절함은 어째 좀 이상해 보인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그게 감사의 마음이다. 그런데 둘 다 기도의 마음인데 어쩜 이리도 다른 느낌이 들까. 얼핏 드는 생각은 무언가를 원하는 기도는 그것을 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가 주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고 기도는 성취될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바를 구하는 기도는 종속적이고 수동적인 기도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감사기도는 지금 이대로도 좋은 것이다. 기도의 상대에게 원하는 바가 없으니 매달릴 이유가 없다. 권력은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가 가졌을 때 발생한다는데 내가 기도하는 대상에게 아무런 바라는 바가 없다면 그는 나에게 권력을 행사할 일이 없게 된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는 겸손하지만 당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직장생활 중 인상 깊었던 한 분이 계셨는데 회사의 청원경찰로 출발하여 그 지역의 최고 직위까지 오른 분이셨다. 그분은 매월 급여일에 작은 가족행사를 가진다고 하셨다. 좀 특이했는데 그분의 가족들은 월급날 저녁이면 서로가 서로에게 큰 절을 올린다고 했다. 두 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큰 절을 올리며 지난 한 달간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해 준 것에 감사와 덕담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는 얘기였다. 좀 오글거리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회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던 분이셨다. 고지식한 면도 있지만 자신이 받는 급여를 당연하다 여기는 사람과 감사히 여기는 사람은 회사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다를 것 같다.
감사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원하고 바라는 바가 적으니 자유인일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가 주인 된 삶을 살며 마음도 넉넉할 것 같다. 그러니 자유를 원하는 자는 감사의 기도를 많이 하는 게 좋겠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나는 바라는 게 없다. 나는 두려운 게 없다. 나는 자유롭다.” 자유란 그런 것이다.
어쩐지 가을의 기도는 무언가를 더 구하는 기도보다는 이 삶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나의 자유는 내 삶에 대한 감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