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딸아이가 물었다

by 장용범

20대의 딸아이가 목표와 현실 사이에서 고민이 많은가 보다. 나의 20대 시절을 보는 것 같다. 평소에는 그러지 않는데 어제는 진지하게 조언을 요청했다. 지난해 제 아빠가 직장에서 어려웠던 사정을 아는 터라 어떻게 극복했느냐고 묻는다. 저가 보기에 아빠가 나름 잘한다고 여겼는데 제대로 인정을 못 받고 어려움을 겪었다는 생각이 드나 보다. 그러고 보니 벌써 1년이 지나갔다. 작년 이맘때를 돌아보면 지금껏 그럭저럭 잘 지내오긴 했다. 오히려 이전의 직장생활과 비교해도 많이 가벼워진 것이 사실이다. 딸아이에게는 목표를 너무 높게 잡지 말라고 했다. 더구나 현실과 목표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지금이 더 힘들고 스스로 불행하다는 생각에 빠진다고도 했다.


작년 7월, 성과 부진으로 현 부서에 별다른 보직도 없이 발령이 났을 때였다. 직원에게는 오후에 나간다 하고 집에서 일찍 나와 카페에 머무르며 마음을 정리하던 중 문득 법륜 스님이 이혼을 고민하는 어느 질문자에게 했던 조언이 떠올랐다. “질문자에게 이혼을 해라 마라는 않겠는데 이리 생각해 봅시다. 나이가 40대 초반의 애가 딸린 여자가 있어요. 아직 젊으니 재혼을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결혼 시장에서 질문자와 같은 조건을 수용하고 살려는 남자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마침 그런 사람이 하나 나타났어요. 질문자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처럼 키우겠다고 하고, 매월 적지 않은 생활비를 벌어다 주겠대요. 자, 그런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혼을 했다 치고 다시 남자를 골랐는데 지금의 남편과 같은 조건이면 상당히 괜찮지 않을까요? 지금 이 시간부터 이혼을 했다 치면 말이에요. 어찌 살든 질문자의 선택인데 저는 좀 현명하게 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스님의 조언을 약간 비틀어 나에게 적용해 보았다. “자, 질문자가 회사를 그만뒀다고 칩시다. 아직 50대로 그냥 놀기에는 뭣하니 일자리를 알아보겠죠. 그런데 사무직의 50대가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가 않아요. 그런데 어느 날 2년제 계약직인데 상당한 연봉에 법인카드를 주고 주 5일 근무와 법정 근로시간을 준수하는 대기업에서 일자리를 주겠대요. 이런 조건이면 어때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지금의 직장이 너무도 감사하게 다가왔다. 오전에 카페에 들어갈 때는 마음이 무거웠으나 나올 즈음에는 상당히 가벼운 마음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래, 이 순간부터 나는 회사를 그만뒀다 치자. 그리고 지금 새로운 일자리를 얻어 첫 출근 하는 것으로 생각 하자’. 그리고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딸아이가 다시 묻는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지 않았냐고. 사실 의식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나의 잘못이 뭘까? 코로나 터져 현장에서는 설계사들이 나가떨어지는데 긴급 요청하는 지원은 모두 거절당하고 그 상태에서 고군분투하다 성과 부진이라는 결과를 안고 물러섰다. 그 이상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당시 대표이사를 찾아뵙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은 올렸지만 ‘이런 상태면 앞으로 회사의 영업이 암울하다’는 말은 패장이 할 말이 아니라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코로나 1년이 지났다. 영업에 대한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최근에는 인사부에서 다시 부산지역 영업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있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이제 1년 좀 더 남은 직장생활을 현 업무에서 조용히 마무리 짓고 싶어서다. 딸아이에게는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세상 사람들은 남의 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이다.’ 처음에는 나를 의식해 위로의 자리도 많이 생겼었다. 사실 그게 더 피하고 싶긴 했는데 누군가 힘들어할 때는 그냥 지켜봐 주는 것도 예의란 걸 알았다.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천송이(전지현 분)의 이런 대사가 있다. “이번에 내가 바닥을 치면서 기분이 참 더러웠는데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사람이 딱 걸러지네. 진짜 내 편과 내 편인 척 가장 했던 사람들. 인생에서 한 번씩 큰 시련이 오는 것, 진짜와 가짜를 걸러내라는 하느님이 주신 큰 기회인가 싶다”. 주변에 참 많은 사람들이 있다 여겼었는데 1년을 지나고 보니 대부분은 스쳐 지나가는 시절 인연들이었다. 하지만 몇몇은 지금껏 남아 함께 하는데 그들과의 만남은 늘 유쾌하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사람들은 자기 일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 그리고 나는 내가 생각하듯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지난 1년은 나에겐 참 고마운 시간들이었다. 딸아이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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