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는 사건이 하나 있다. 때는 1990년, 내가 장교로 군 복무를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남들 부러워하는 후방 부대 그것도 부산 해운대 신병 교육대의 교관으로 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신병교육대는 신병들의 훈련을 마치면 일주일 간의 정비 기간을 거쳐 새로운 신병을 맞이한다. 훈련의 클라이막스는 유격과 행군인데 교관과 조교는 늘 그 일정을 정기적으로 수행해야 했다.
그날은 신병 퇴소를 마친날이었는데 행군 후 피로도 풀 겸 해운대에 나와 시설 좋은 어느 사우나에 들어갔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사람들은 없었고 탕 속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나는 샤워를 하고 탕에 들어갔는데 맙소사 그는 온몸에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탕의 마주 보는 위치에 앉아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애써 무시하는 듯한 묘한 태도를 취했다. 그래도 내가 대한민국 육군 중위인데라는 어떤 자존감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는데 “물이 참 조스므니다.” 그랬다. 그는 일본인이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일본어 실력은 기본적인 말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대화까지 나눌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계속 말을 해준 덕에 어느 정도 어색한 분위기는 좀 풀렸다.
그때 나는 양팔을 여전히 탕에 걸친 채 그를 보며 최대한 거만하게 천천히 한 마디 던졌다. “아나따와 야쿠자 데스까”. 나의 말에 그는 무척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의 문신을 가리켰다.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진 나의 또 한 마디 일본어는 이랬다. “와따시와 군징데스”. 그 후는 어찌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는 야쿠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시인 류시화의 책을 읽다 보니 ‘나의 품사’라는 글에 ‘너는 누구인가?’라는 음성에 대해 주고받는 문답이 나온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 나왔던 익숙한 대화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너는 누구인가?”
“나는 OOO입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군인가.”
“저는 OO회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의 회사와 직책을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저는 한 여자의 남편이고 두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내가 너의 가족관계를 묻지 않았다. 너는 누구인가?”
(중략)
“그러게요. 제가 대체 누구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시를 쓸 때 시인이지 시를 쓰고 있지 않으면 시인이 아니다. 택시를 타면 승객이고 아내 앞에서는 남편이지만 회사에 가면 직장인이다. 어느 하나 정해진 것이 없으니 어느 것 하나 “나”라고 정할 것이 없다. 그래서 붓다는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무아”를 언급하며 존재 자체를 이야기했었나 보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고 할 것이 없으니 나는 자유롭고 역동적이다. 이게 말장난 같지만 말이 된다.
“와따시와 군징데스”
이미 30년 전의 일이니 나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니다. 이것이 광화문 집회에 여전히 군복을 입고 나오는 노인들이 웬지 부자연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엇이 아닌지를 관찰하면서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놀라운 메세지를
발견할 수 있다. (토머스 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