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 딸들, 생일 축하한다

by 장용범

먼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난 너희들의 스물네 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돌아보면 참 빠르게 지나간 세월이었다. 너희들이 태어날 적엔 아빠도 지금의 아이돌만큼은 아니어도 인물이 좋았는데 요즘은 매일 아침 빠지는 머리숱을 안타까워하는 중년의 아저씨가 되고 말았네. 아무리 운동을 해도 한 번 나온 뱃살은 빠질 줄 모르니 이젠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여야지 싶다. 그러니 앞으로 아빠 뱃살에 대한 언급은 우리 집에서 금기어임을 명심해라. ^^;


이제 사회진출을 앞두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는 너희들을 보면 좀 안쓰럽다는 마음도 든다. 그래도 아빠의 20대 시절엔 여러 여건들이 좋아 직장도 골라가던 시절이었는데 요즘의 청년들은 삶이 많이 팍팍해진 면도 있다. 어제 예약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생일 선물 달라는 너희들에게 ‘밥 사줬으면 됐지 선물은 무슨’이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뭘 하나 챙겼어야 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는 내 생일 때 이런저런 선물들을 하긴 했구나. 가장 최근에는 ‘레고’ 세트를 안겨주어 조립하는 재미에 푹 빠지게도 했고, 나를 위한 요리 도구들도 인상 깊었던 선물이었다. 그런 면에서 은근 미안하긴 하다. 그렇다고 앞으로도 너희들 생일 선물을 살뜰히 챙길 것 같진 않다. 대신 이 글 한 편으로 너희들 생일 선물에 대할까 한다. 보아하니 친구들이 선물 꽤나 한 것 같던데 거기에 하나 얹는 것보단 이게 더 낫겠지(사실, 돈 좀 아끼려는 심산이긴 하지만 ^^;)


어떤 내용으로 쓸까 하다가 ‘이거 해라 저거 해라’는 꼰대 소리보다는 그냥 내가 이 시대의 20대 라면 할 것 같은 내용들로 적어 본다. 사회생활 30년을 경험한 내가 지금의 20대라면 무엇을 할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내용이긴 하다. 난 무조건 지금이 딱 좋으니까. 그래도 너희들을 위해 아빠가 오늘 젊어졌다는 상상을 하기로 했다.


우선 어떤 시험이든 정해둔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하고 더 이상 미련 두지 않겠다. 그게 입사를 위한 시험이든 자격시험이든 마찬가지인데 그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아빠가 직장생활 30년을 해보니 대기업에 들어간 동기들이 나처럼 남아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더라. 군대의 계급정년처럼 일정기간 안에 승진 못하면 퇴사 압력이 심해지는 것이 대기업 문화인데 그것도 아주 비인간적으로 사내 메일로 종용받기도 하고, 일을 안 주는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더라. 대개 40대에 그런 일을 당한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보통 그만두는데 처음부터 대기업에 근무한 사람은 그보다 못한 기업에는 근무하기가 어려워진다. 자꾸 이전과 비교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회적 생존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대기업 직원이나 공무원처럼 큰 조직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는 부품과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길게 보면 생각보다 그리 안정적이지 못한 게 대기업이란 말을 하고픈 거다.


일의 적성에 대해서는 좀 열린 마음을 가질 것 같다. 자주 듣는 이야기지만 이제 처음의 직장이 평생을 간다는 생각은 않는 게 맞다. 자기에게 꼭 맞는 일을 찾아야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Fit Theorist) 어떤 일이든 진행되는 가운데 성장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Develop Theorist)이 있다. 내가 보기에 첫째는 자기에게 꼭 맞는 일을 찾아야 할 것 같고, 둘째는 어떤 일이든 시작하면 성장을 통해 보람을 느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공통점은 일단 시작해 봐야 안다는 것이다. 멀리서 만원 버스가 다가올 때 도저히 내가 올라탈 수 없을 것 같지만 어째 어째 올라타다 보면 그 안에 내 발을 둘 장소 하나는 있는 것이 사회생활 같다. 일에 대해서는 좀 가볍게 생각할 일이다.


소비에 대해서는 절제된 삶을 지향하겠다. 보통 사람들의 돈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두 가지이다. 돈 자체를 추구하거나 돈을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거나 이다. 달리 말하면 돈의 노예가 되거나 돈을 노예로 삼거나 이다. 돈을 노예로 삼는 사람의 공통점은 검소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색한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필요 충족을 위해 돈을 쓰고, 욕구나 욕망에 따른 소비는 절제하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수준까지 가려면 남의눈을 의식하지 않는 상당한 자존감이 있어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책을 읽거나 여행, 세미나 참석 등 다양한 직간접 경험을 확대하겠다.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그들이 있는 장소에 가야 한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은 맞는 말인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심에 따라 모이고 움직이게 마련이다. 연예인 주변에는 연예인이 있고 선생님 주변에는 선생님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런 면에서 너희들이 그런 여행이나 세미나 등에 가겠다면 아빤 지원할 용의가 있다. 하지만 외국여행은 경비의 50% 정도만 지원할 테니 나머지는 너희가 벌어서 가거라.


아직 독립하지 않은 상황이면 집안일을 좀 돕겠다. 성인이 되어 부모와 함께 지낸다면 가사는 알바라 여길 것 같다. 만일 서울서 원룸을 제공받고 숙식을 해결하는 조건을 생각하면 꽤나 저렴한 편이다. 아침,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정기적으로 청소나 빨래를 하는 등의 가사 활동은 부모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밥 값으로 제공하는 노동이라 여기겠다. 이건 너희에게도 중요한 일인데 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받기만 하는 사람은 결코 독립할 수 없는 법이다. 그 대상이 설령 부모라 하더라도. 그런 면에서 최근 첫 째의 가사활동을 아빠는 높이 평가한다.


이성교제에 대해선 환상을 갖진 않겠다. 이성은 조건이나 외모보다는 나와 가치관이 맞는지를 볼 것이다. 그리고 연인이라 해도 구속보다는 따로 똑같이를 생각하겠다. 연인은 남녀의 자연스러운 만남 가운데 발전하는 것 같다.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도 너무 어렵게 생각 않을 건데 이 사람을 선택하면 평생 가야 한다는 생각이면 결혼하기가 힘들어진다. 아빠는 이시형 박사의 책에 나온 이 구절을 읽고 결혼을 결심했다. ‘이혼할 수 있는 사람은 결혼할 수 있다.’ 나의 선택이 올바르기를 바라지만 아닐 수도 있는 게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을 정해 민법 공부는 할 것이다. 공무원 학원을 가서 그 과목만 들어도 좋은데 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법 과목이다. 사회생활 중 일의 진행이나 적어도 사기당하는 일을 어느 정도 예방하는 수단 같아서다. 사실 토잌 점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민법 공부 같다.


마지막으로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겠다. 3-3-3법칙이라고 습관은 들이기 나름이다. 3일-3주-3개월만 지속하면 웬만한 습관은 들게 마련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잘 사는 법은 좋은 습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적고 보니 아빠의 잔소리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고민하는 일과 연애, 사회생활에 대해 평소 생각하는 바를 좀 정리해 보았다. 그럼에도 아빠는 너희들의 존재 그 자체로 행복한 사람이다. 두 딸에게 늘 고맙고 감사하다. / 아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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