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 소소하고 재미난 나날들

by 장용범

조금 이른 퇴근을 했다. 남산 문학의 집에서 열리는 김창진 교수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함이다. 행사 끝무렵 도착한 터라 질의응답 시간 중에 입장을 했다. 아는 지인들의 모습도 많이 보이고 교수님이 한국의 몇 안 되는 러시아 전문가다 보니 러시아 대사관에서도 참석을 하신 것 같았다. 이번에 내신 책은 저자와 번역자로 각각 한 권의 책을 출간하셨는데 ‘똘스또이와 함께한 날들’과 ‘루소포비아’이다. 그중 ‘루소포비아’는 유럽의 러시아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그에 따른 지나치게 사실을 왜곡하는 프로파간다적 내용을 다룬 것인데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와 맞물려 서점가에선 베스트셀러로 진입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교수님도 현 상황이 신기하신지 ‘그간 책은 여러 권 내었지만 베스트셀러로 진입하긴 처음인데 국제정치 서적이 이렇게 인기를 얻으리라곤 미처 생각을 못했다’며 웃으셨다. 교수님의 제안으로 행사 후에 저녁을 먹으며 ‘유라시아 평론’의 발간에 따른 웹호스팅 업체 선정에 대한 논의를 하려 했으나 축하인사와 반가운 얼굴들의 환담으로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이야기와 웃음이 풍성한 자리가 되어 좋았다.


마음이 가는 곳에 에너지가 간다는 말이 있다. 요즘 나의 에너지는 직장생활을 벗어나면 글쓰기와 외부 커뮤니티 활동에 쏠리고 있다. 은퇴를 앞두면 여러 감정들로 복잡하다고 하는데 오히려 이것저것 시도하는 것들이 늘어나 재미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20년 동안 7개국을 베이스캠프 삼아 살아온 가족이 있다. 가장이 IMF로 직장에서 내몰리자 300불을 들고 멕시코로 떠난 것을 시작으로 삶과 여행이 일체 된 국제 유목민의 생활을 하고 있는 특이한 경우이다. 이미 책을 읽어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분들이 출연한 다큐가 있어 한참을 몰입하며 보았다. 가장인 김현승 씨는 인터뷰에서 ‘주어진 삶을 살기보다는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 가는 삶을 살고 싶었다’고 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사람마다 다른 선택의 문제이다. 짐은 여행가방 네 개에 넣을 수 있을 만큼이 기준이라고 하는데 그리 살아도 생활이 된다는 게 신기하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소유를 목적으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전 세계 월세는 100만 원 수준으로 비슷한 것 같아요. 다만 나라에 따라 방의 수나 크기만 달라지는 수준이죠’라는 말에 ‘어, 그래? 나도 해볼까’라는 마음도 생긴다. 저 정도를 가지고도 한 곳에 머물지 않는 삶의 궤적이 가능다면 지금의 내 조건은 그들에 비해 매우 양호한 것 같아서다. 문제는 그런 마음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가이다. 다큐를 본 후에 한참을 끄적여 본다. 은퇴 후 저렇게 지내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다.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각자의 인생을 살게 하고 우리 부부는 가고 싶은 나라를 선택해 월세 100만 원 수준에 그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지내본다면 은퇴 후 10년 정도는 꽤나 재미난 경험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좀 재미나게 살고 있다. 국내 부족한 러시아 관련 정보를 전달하는 웹진 창간 작업이나 늦은 나이에 글쓰기의 매력에 빠져 이것저것 연관된 활동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나오기도 하고, 남은 학기의 대학원 마무리까지 할 게 많아 좋긴 하다. 주어진 삶을 살기보다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 가는 삶이란 이렇듯 가슴 설레는 일이다. 어제 옆자리에서 계셨던 금감원 출신 김 이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본인의 상사 이야기를 하시면서 현역 시절 직위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니 너무 작아지더라고 하셨다. 세상에 영원한 내 것은 없다. 그리고 지금 소유한 것 중에 세상을 떠날 때 우리가 가지고 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이 한 마디면 최고의 인생일 것이다. ‘아, 참 잘 살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