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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 네 짐은 네가 져라

by 장용범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여러 장치들은 얼마나 부실한가. 돈, 명예, 지위, 건강, 사랑과 우정 등등은 평소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장치들이다. 우리는 좀 더 많은 삶의 장치들을 지니기 위해 준비하고 하루하루의 열정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늘 허망한 상태로 끝날 때가 많다. 질병과 죽음, 각종 사고와 실패, 이별 등은 피하고 싶지만 늘 따라오는 삶의 방해꾼들이다. 3.1절 휴일,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에 귀가 열려 있는데 작은 부고 기사가 하나 떴다. 넥슨의 창업자 김정주 회장의 사망 소식이다.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하니 자살인 것 같다. 사주명리학에 따르면 태 과불급 개위질(太過不及 皆爲疾)이라 하여 넘쳐도 모자라도 병이 된다고 했다. 사람의 사주를 보면 모든 것을 고르게 적절히 갖춘 운명은 없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잘 사는 삶이란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서 넘치는 것은 덜어내고 모자라는 것은 채워가며 사는 게 최선의 삶인 것 같다. 그게 붓다가 말씀하신 중도의 삶일지도 모른다.


휴일 한 지점장을 만났다. 지난주 안부도 물을 겸 연락을 취했는데 많이 어렵다기에 휴일 서울 집에 오는 길에 식사나 하자며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늘 이런저런 걱정이 많은 섬세한 성격이다. 오랫동안 본사 근무만 하다 자신의 뜻대로 현장을 이끌어 보겠다며 호기롭게 자원한 경우였다. 서로의 얼굴을 대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이 ‘포기’라는 말과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본사에서도 승진을 하여 막상 사람들을 리드해야 할 위치가 되자 아랫사람과의 갈등으로 마음고생이 많았던 그였다. 꼼꼼하고 내성적인 그의 성격은 다양한 인간관계보다는 조용히 혼자 일하며 성과를 내는 것이 맞을 것 같은 사람이다.


지점의 상황이 어떠냐고 물으니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했다. 새로 온 계약직 직원은 고객 응대를 제대로 못하고 본인은 지방 발령이 났는데도 주거비용이 지원 안 되니 생활이 안정되지 않는다고 했다. 전임 지점장이 완전 해악을 끼쳐 악영향이 크니 성과를 못 내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냐고 했다. 조용히 듣고 있는데 갑자기 나의 근황을 물었다. 얼마 남지 않은 직장생활을 하는 마음이 어떠냐고 말이다. 보통 이런 경우의 대화는 그 기분에 동조해 줘야 이야기가 쿵짝쿵짝 이어진다. 마치 누가 더 불행한가를 경쟁하듯이 너만 그런 게 아니다 나도 그렇다는 대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 그런데 꼭 그렇게 남의 처진 기분에 맞춰주는 대화를 하다 보면 내 마음마저 꿀꿀해지는 경험이 많아 뭐 그럭저럭으로 응대하는 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렇게 힘든데 상대는 잘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괜히 심사가 틀리는 게 인간 심리다. 그러니 남에게 하는 나의 자랑질은 할 게 못된다.


그런데 어제는 상대가 너무 침울해 보여 나까지 그런 기분에 물들고 싶지 않아 은퇴가 설레는 면도 있다고 말했다. 젊어서부터 이곳에 들어와 재미나게 열정적으로 일했기에 아쉬움은 없고 가정과 조직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좀 내려놓고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기대감을 언급했다. 역시나 약간 실망의 빛을 보인다. 힘들수록 웃어야 한다. 이런 말이 있다. “울어라, 너만 혼자 울고 있을 것이다.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짐도 무거운데 남의 우울한 이야기까지 듣고 싶은 사람은 없다. 나의 힘든 이야기는 푸념이 아니라 요청으로 해야 한다. 이것만 되면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좀 도와달라고 말이다. 어제의 그는 자신의 지점이 안 되는 이유를 정말 많이 알고 있었다. 이럴 때 상대방은 속으로 So What?(그래서 어쩌라고?)이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자신의 짐은 결국 자신이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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