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말에 은퇴라고 하면 벌써 그리 되었냐고 한다. 이어서 은퇴 후 30년의 삶을 더 살아야 하니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일견 맞는 말이지만 돈을 버는 이유가 나중에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함이라고 할 땐 좀 이상하긴 하다. 은퇴하고서도 더 열심히 벌어 의사에게 갖다 주라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가족이 생활하기 위해 돈을 벌었고 이제는 준비된 은퇴자금으로는 부족하니 더 벌어야 한다는 논리다. 이렇듯 은퇴에 관한 이야기의 초점은 늘 돈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돈이란 쓰기는 쉬워도 벌거나 모으기는 어렵다. 더구나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사태 같은 외부의 변수라도 생기면 인플레로 인해 내가 가진 돈의 양은 변함없는데 가치는 더 떨어지게 된다. 이렇게 은퇴 후 미래를 생각하면 끝없이 불안한 상황만 예견되는 것이 은퇴 후 생활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50대 초반에 불교를 접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죽음을 비롯한 삶의 고(苦)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 영향으로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좀 담담해진 면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매일매일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조금씩 죽어갈 것인지. 뭐가 다른가 싶지만 죽어가는 삶은 아래로 조금씩 꺾어지는 모양이지만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은 그래프 모양이 평행이거나 우상향 하다가 한 순간에 뚝 떨어지는 모습이다.
사실 50대 은퇴 후에 뭐 그리 좋은 일자리가 있겠는가? 청년들도 일자리가 없어서 저 난리인데 50대 은퇴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일자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50대는 일에 대한 개념을 달리 정립해야 한다. 지금껏 잘 살아왔고 은퇴를 맞이했다. 적든 많든 내 손에 쥐어든 돈이 나의 은퇴자금이다. 그 안에서 생활하고 부족하다 싶으면 일의 성격은 너무 따지지 말고 돈 버는 일을 하자. 목적은 돈이지 일의 모양새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일만 아니라면 어떤 일이라도 괜찮다. 하지만 은퇴자금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의식주가 해결될 수준이면 좀 끌리는 일을 해보자. 남은 생에 돈이 부족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죽어가는 삶을 살지 말고 오늘 하루만 산다는 마음으로 살아보자. 그렇게 매일매일 하루를 살다가 어느 날 죽음이 찾아오면 ‘뚝’하고 떨어지는 삶이 더 끌린다.
며칠 전 진행 중인 인터넷 신문사 편집장님이 전화를 주셨다.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며 사무국장 자리가 허드레일이 많아 일정 댓가를 지급해야 하는데 지금은 재정이 어렵다는 말씀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만일 돈을 보고 시작했다면 다른 일을 했을 것이다. 그날 이렇게 말씀드렸다. “편집장님, 이건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그간 직장 내 조직관리나 운영에 대한 경험이 법인 설립과 운영에 적게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아 자원한 일이니 당장은 보수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돈을 받지 않으니 노동은 아니다. 하지만 일이 되어가는 재미를 느끼니 놀이 같은 일이다. 나는 은퇴 후 일의 의미를 돈이 아닌 곳에서 찾아보는 인생 실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