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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 뭔가 되어가는 사람

by 장용범

서서히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어 아침 산행의 즐거움이 커지고 있다. 조금 늦은 개화인 것 같다. 보통 3월에는 꽃들을 보았는데 4월이 다 되어서야 녀석들을 보게 되었다. 잎을 내기 위한 새싹들의 경쟁이 한창이다. 이제야 봄이 왔나 보다. 코로나로 마스크를 쓰고 있고, 지구 건너편에는 전쟁의 아픔이 이어지지만 계절은 어김없이 봄이 되었다.


문학가이자 철학자인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상을 거부한 이유가 노벨상을 받으면 상을 받은 사르트르가 진짜 사르트르를 사유를 방해할 것 같아서라는 이유였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그냥 툭 던져진 피투(被投)적 존재라고 했다.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툭 던져졌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눈앞에 지금 키보드가 있다. 이 키보드는 만들어진 게 먼저일까, 키보드를 만들어야겠다는 목적이 먼저일까? 당연히 목적이 먼저이다. 컴퓨터에 글자를 입력하려니 뭔가가 있어야 할 것 같은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고민하고 그 결과 뚝딱뚝딱 키보드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글자 입력 방식이 발전하여 글 쓰는 이의 마음을 읽어 입력할 수 있다면 이럴 때도 키보드가 필요할까? 키보드는 더 이상 존재의 목적이 사라져 폐기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보자. 과연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있는가? 어릴 적 열심히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에는 태어난 목적이 있다고 했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말이다. 이제와 생각하니 정말 헛소리다. 이 땅에 태어난 게 내가 원해서 태어나지 않았고 내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마치 태어난 이유가 정해진 것처럼 교육시켰다.


사람이 태어난 데는 목적이 없다. 그냥 태어났다. 그래서 사는 게 만만치 않은 것이다. 내가 칠판의 지우개로 태어났다면 나의 목적은 칠판의 글을 지우는 것으로 내 존재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신호등으로 태어났다면 빨간불 파란불 번갈아 보여주며 내 목적을 달성한다. 하지만 사람은 태어난 후부터 뭔가를 선택하고 만들어 가야 한다.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는 개개인이 다 다르다. 의자는 다리가 부러지면 목적을 달성 못하기에 버린다. 하지만 인간은 팔다리가 없다고 해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존재이다.


목적 없이 태어난 인간은 살아가면서 뭔가가 되어간다. 연기로 감동을 주는 배우가 되어가고 도둑이 되어가고, 권력자가 되어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전쟁을 일으켜 여러 사람을 아프게도 한다. 이 봄, 아침 산행으로 진달래와 개나리, 파란 싹의 향연을 보며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PS/

1,000회 이후부터는 주말에는 글을 좀 쉬겠습니다. 월요일 뵐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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