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드라마의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의사는 모두 수술하는 의사라는 것이다. 유명 의학드라마 <하얀 거탑>의 김명민, <뉴하트>의 지성, <낭만닥터 김사부>의 한석규 모두 외과 계열의 의사로 등장한다. 심지어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는 주인공이 다섯 명인데 다섯 명 전부 수술하는 의사로 설정되어 있다. 왜 의학드라마는 외과의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걸까? 어찌 보면 당연하다. 드라마로 만들기에 좋기 때문이다. 피가 사방으로 튀는 응급수술, 환자를 깨운 상태로 하는 신기한 수술, 위험했던 환자가 수술을 통해 건강을 되찾는 모습 등 드라마의 긴장과 재미를 끌어내는 데에는 수술만 한 것이 없다.
다수의 의학드라마가 성공을 거두면서 자연스럽게 '의사=수술'이라는 공식이 대중의 머릿속에 박혀버린 감이 있다. 미디어에 수술하는 의사만 나오다 보니 모든 의사는 수술하는 의사라는 오해가 생겨버린 것이다. 사실 수술을 본업으로 삼는 의사는 전체 의사 중 삼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의사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의사는 수술을 전혀 하지 않는 내과의사이다. 수술을 하지 않는 의사가 하는 의사보다 훨씬 많은데, 다른 의사들은 도대체 어떤 일을 하면서 지내는지 대형 병원을 중심으로 말해보고자 한다.
대형 병원에 입성하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건강하다고 믿었던 사람은 검진을 거쳐서, 조금 아프다고 믿었던 사람은 작은 병원의 진료를 거쳐서, 그리고 많이 아픈 사람은 응급실을 거쳐서 대형병원에 들어온다. 건강하다 '믿었다', 조금 아프다 '믿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대형 병원에서는 많이 아픈 사람만 진료를 받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과정을 통해 대형 병원 진료가 필요한 환자로 분류가 되는데, 이 과정 속에서 환자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여러 명의 의사를 거치게 된다. 바로 진단 분야에서 일하는 의사들이다.
병원에 가면 여러 가지 검사를 하게 되는데, 진단 분야의 의사들은 그 검사들의 결과를 판독하고, 믿을 수 있는 검사 결과라는 증명을 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들은 직접 환자를 만나지 않기 때문에 환자는 이들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검사에 쓰는 기계가 잘 작동하는지 평가하고, 절차대로 검사가 진행됐는지 확인한다. 또한 검사 결과가 나오면 결과를 꼼꼼하게 살펴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해 주고, 의심 가는 병을 짚어 진단을 내려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서명을 남겨 검사 결과의 신뢰도를 보장하면 역할이 끝난다.
그렇게 나온 검사의 결과들은 검사를 처방했던 한 명의 의사에게 모이게 된다. 검진을 받은 거라면 검진 의사, 응급실에 갔던 거라면 응급실 의사에게 모이는데, 이 의사들은 직접 환자 상태를 체크하고 검사 결과를 종합하여 환자가 다음으로 받을 처치를 결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결과에 이상이 없다면 안심하고 귀가할 수 있게 안내하고, 이상은 있는데 작은 문제라면 적당히 알아서 처치하기도 한다. 하지만 환자가 많이 아픈 것으로 판단될 경우에는 적절한 처치를 해줄 수 있는 치료 분야의 의사에게 환자를 보내게 된다.
치료 분야는 가장 많은 수의 의사가 일하고 있는 분야로, 환자가 만나는 의사들은 대부분 이 분야에 속해 있다. 치료 분야의 의사들은 환자의 주치의 역할을 맡아 환자의 치료에 관련된 모든 것을 진두지휘한다. 처음 환자가 오면 보통 몇 가지 검사를 더 시행하여 진단을 정확하게 하고 환자의 현재 상태를 파악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후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은 주치의는 환자에게 가장 적합한 치료를 선택하여 치료를 시작하게 되고, 치료가 끝난 뒤에 환자를 관리하는 역할까지 맡는다. 치료 후 관리는 치료 효과, 치료 후 회복과 부작용, 병의 재발 등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으로, 치료를 시행한 주치의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치료는 한 가지 방법으로 할 때도 있지만, 여러 가지 치료를 함께 사용하는 경우도 흔하다. 여러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주치의가 다른 치료 분야 의사에게 치료를 의뢰하게 되는데, 그래도 주치의는 바뀌지 않는다. 예를 들면, 유방암은 보통 유방외과에서 주치의를 맡아 수술하는 병인데 상황에 따라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유방외과 주치의가 종양내과 의사와 방사선종양학과 의사에게 환자를 보내서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게 하고, 치료를 마치면 다시 주치의인 본인에게로 돌아오게 하여 치료 후 관리를 한다.
환자의 치료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의료의 큰 그림을 그리는 보건 분야의 의사들도 있다. 각종 질병의 통계를 내고 통계를 분석하여 질병의 이모저모를 밝혀내 활용하는 역할이다. '흡연자가 암에 걸릴 확률이 높으니 금연 캠페인을 펼쳐야 한다' 같은 류의 의견을 내기도 하고, 가습기 살균제나 라돈 침대 같은 사건이 터지면 그것이 건강에 실제로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도 한다. 통계를 바탕으로 전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의료 정책을 만드는 일을 하기도 한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이 분야의 대표적인 의사로, 코로나 대응 외에도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수술 이외에도 의사가 하는 일이 이렇게 다양하다.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체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가진 의사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의사는 수술을 하고, 다른 어떤 의사는 컴퓨터 앞에 앉아 정보를 분석하며 각자 맡은 일을 하고 있다. 비록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박진감 넘치게 일하고 있는 건 아닐지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의사들이 모여 의료가 돌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