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이 병원에서 실습을 돌다 보면, 환자를 배정받고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교수님이 공부한 환자에 대해 발표해보라고 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환자 발표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어서 잘 지켜서 발표를 하는 게 중요하다. 학생 때는 별생각 없이 발표 형식을 그대로 외워 쭉 읊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참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발표 형식임을 느끼게 된다.
발표의 세세한 형식을 설명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고, 첫 문장만 소개하고자 한다. 환자 발표의 첫 문장은 항상 환자 이름과 함께 나이, 성별, 병원에 오게 된 증상과 그 기간으로 구성된다. "박시호, 29세 남자 환자로, 3일 전부터 시작된 복통으로 내원하였습니다." 이런 식이다. 별 거 아닌 문장 같은데, 사실 환자 발표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이다. 저 한 문장만 들으면 의심되는 병 서너 개, 물어보고 싶은 질문, 해보고 싶은 검사가 머릿속에 즉시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떠오른 대로 행동하면 될 뿐이다.
나이와 성별이 별 거 아닌 정보 같은데,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정보다. 환자의 전반적인 상태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복통으로 온 20대 환자와 70대 환자 중 누가 더 위험할지는 의사가 아니어도 알 수 있고, 남자와 여자 사이에 큰 신체적 차이가 있는 것 역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의사는 나이와 성별에 따른 차이를 좀 더 심도 있게 공부했을 뿐이다. 그래서 복통을 일으킬 수 있는 수십 가지의 질병 중에서 나이와 성별을 듣고 가장 흔한 서너 가지의 질병을 골라 확인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 물론 단순 확률로 생각한 질병들이기에, 검사해보면 전혀 다른 병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증상과 그 기간 역시 매우 중요한 정보다. 똑같은 복통이어도 며칠 동안 배가 살살 아픈 복통이 있을 수 있고, 30분 전부터 갑자기 배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구르는 복통이 있을 수도 있고, 1년 전부터 배가 가끔씩 살살 아팠는데 한 달 전부터 더 자주 더 많이 아픈 복통이 있을 수도 있다. 위치도 중요하다. 오른쪽 윗배가 아픈 사람도 있고, 왼쪽 아랫배가 아픈 사람도 있고, 배 전체가 다 아픈 사람도 있다. 같은 증상이라도 증상의 세부 사항에 따라 의심되는 병이 완전히 달라진다. 언제부터 어디가 어떻게 아팠는지 알아내는 것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정보인 것이다.
나이와 성별은 보통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확인이 어렵지 않은데, 증상은 환자에게 직접 물어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때 잘 물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가끔 어디가 아픈지 물어보면 엉뚱하게 10년 전 아팠던 이야기, 가족 중 누가 돌아가신 이야기, 또는 별 상관없는 신세 한탄 등을 늘어놓는 환자들이 있다. 전적으로 의사 잘못이다.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깔끔하게 질문을 해야 하고, 다른 길로 새는 듯하면 적당히 끊어주기도 해야 한다. 그래도 아프다고 병원에 와서 다른 얘기를 하는 환자들을 보면 '심하게 아픈 것은 아니구나' 하는 마음에 오히려 안심이 되고 마음이 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