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과 인턴 때 일이다. 비싼 로봇 수술을 받고 VIP 병실에 입원한 아주머니 환자가 있었다. 은근히 우악스러우면서도 부유한 태가 나는 환자였는데 사투리도 약간 있고 시골의 부농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설 연휴 직전에 입원하셔서 설 연휴 내내 수술 부위 드레싱을 해드렸다(연휴 때는 다른 의사는 거의 다 쉬고 인턴만 남는다). 보통 아주머니 환자들은 고맙다고 빵이나 우유, 요구르트를 많이 주시는데 퇴원하는 날 드레싱을 해드렸더니 그동안 고마웠다고 직접 키운 고구마 한 박스를 가져가라고 하셨다. 한참 안 받는다고 하다가 별 수 없이 가져와서 인턴 방에 뒀더니 인턴 누님들이 신나게 가져가서 잘 쪄 드셨다.
# 다짜고짜 수혈 동의서
응급실 인턴 때 일이다. 응급실 의사가 나에게 환자가 상태가 안 좋아 수혈이 필요하니 나가서 보호자에게 수혈 동의서를 받아 오랬다(환자가 안 좋은 경우 보호자가 같이 못 있고 밖에서 대기한다). 응급실 입구에서 ‘ooo님 보호자분!’ 했더니 어떤 젊은 부부가 달려왔다. 당시 응급실이 바쁜 상태로, 응급실 입구에도 대기 환자가 상당히 많았다.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갑자기 여자 보호자가 ‘아니 좀 찢어진 걸로 수혈까지 해야 돼요?’ 앙칼지게 물어봤다. 보호자 옆을 보니 얼굴이 약간 찢어진 아이가 있었다. 다시 환자 이름을 확인하니 아이와 환자 이름의 모음 구성이 비슷하더라. 힙합으로 치면 라임(rhyme)이 좀 맞는 이름의 두 환자였던 것이다. 하도 바쁘고 붐비니까 보호자와 나 모두 정신이 없어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얼른 죄송하다 하고 다시 보호자를 찾아서 동의서를 받았다.
#실신 아니고 발작
내과 인턴 때 일이다. 할아버지 환자 한 명이 기절을 했다고 전화가 왔다. 급히 가보니 멀쩡했다. 할머니 보호자에게 물어보니 ‘어제오늘 4~5번은 기절을 했다. 근데 의사 선생님만 오면 멀쩡해지니 별일이다’ 그러셨다. 환자가 기절하는 것은 작은 사건은 아닌데, 마침 주말인 데다가 바이탈 사인은 완전 정상이어서 적극적인 조치가 취해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실 의사가 볼 때는 정상인데 보호자들이 과장하는 경우도 많아서 인턴 입장에서 섣불리 뭔가를 해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기절하는 것을 의학용어로 ‘실신’이라고 하는데, 항상 ‘발작’과 감별이 중요하다고 배운다. 그런데 보호자 말을 들어볼수록 실신보다는 발작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마침 옆에 젊은 손녀 보호자가 있길래 할아버지가 다시 기절하면 아무것도 건들지 말고 일어날 때까지 동영상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두어 시간 뒤 다시 기절했다고 해서 갔더니 다행히 동영상을 찍어 두어서, 확인해보니 의식을 짧게 잃으면서 양 손을 꼼지락 하는 것이 영락없는 발작이었다. 레지던트에게 동영상을 보여줬더니 바로 신경과에 연결해서 약을 처방받았다. 그 뒤로 더 이상 발작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