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은 3월 1일부터 일을 시작하여 다음 해 2월 말일까지 정확히 1년 동안 근무한다. 근무하는 과는 한 달에 한 번씩 변경이 되는데, 한 달의 근무가 끝나면 일한 과의 레지던트가 그 인턴을 평가하여 점수를 매긴다. 인턴은 결국 레지던트가 되기 위한 과정인데, 레지던트 지원은 11월에 이루어진다. 그런 이유로, 인턴은 사실상 3월부터 10월까지만 근무 평가를 받게 된다. 11월부터 2월의 인턴은 수능이 끝난 고3처럼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데, 이를 일컬어 끝 말(末) 자를 써서 ‘말턴’이라 한다.
말턴이 되기 전의 인턴은 평가 점수에 묶여 있기 때문에, 레지던트에게 절대복종하면서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레지던트 입시에서 경쟁이 예상되는 경우, 조금이라도 밉보이면 점수가 깎일까 두려워 아무리 불합리할 일을 당해도 침묵하고 묵묵히 견뎌 내기도 한다. 점수를 빌미로 인턴을 압박하는 레지던트도 있고, 그에 굴하지 않고 할 말을 다 하다가 점수를 실제로 낮게 받는 경우도 있다. 레지던트가 평가한 인턴 점수는 즉시 공개되지 않고 11월에 합산하여 공개되기 때문에, 근무 평가는 아무래도 인턴이 불리한 점이 많다. 그래서 인턴들은 불합리한 일을 당할 때마다 생각한다. ‘11월만 되어봐라. 말턴만 되어봐라’
말턴이 된 인턴은 생각보다 자기 할 일도 잘하고, 통제가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11월이 되면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더 걱정하기 시작한다. 레지던트는 갑자기 본인이 을이 된 거처럼 행동한다. 예전 같았으면 ‘검사 냈으니까 빨리 해주세요’ 하고 전화를 끊었을 사람이 ‘선생님, 이 환자분이 조금 안 좋으셔서요. 검사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하고는 나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바쁜 일 때문에 조금 늦어지는 경우, 예전에는 전화해서 빨리 안 하고 뭐하냐고 했을 텐데, 말턴 때는 그냥 ‘바쁘신가 보다’하고 레지던트 본인이 해버릴 때도 있다.
간호사의 태도도 많이 바뀐다. 피를 뽑거나 배에서 물을 빼거나 하게 되면 준비물이 많다. 예전에는 준비를 거의 안 해줬던 거 같은데, 말턴 때는 준비물 다 꺼내 놓고는 ‘선생님~ 제가 준비 해 놨으니까 가서 해주시면 안 돼요?’ 하고 간절하게 부탁한다. 이전에는 전화하고 10분 안에 안 오면 두 번 세 번 전화해서 언제 오냐고 묻던 간호사가, 전화하고 30분 만에 나타나도 왜 이렇게 빨리 오셨냐고 하는 경우도 있다.
말턴이 되면 실제로 조금 느긋해지는 것은 있다. 한 번의 움직임으로 모든 일을 끝내려는 습성이 있어서, 일이 어느 정도 모일 때까지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일을 하는 중에도 절대 급하게 움직이는 법이 없다. 급하게 해 봤자 실수만 늘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절대 계단을 사용하지 않는다. 인턴 초반에는 대여섯층씩 뛰어다녔지만, 말턴은 단 한 층을 움직여도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이 습성들은 인턴이 하는 일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깨우쳤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말턴은 전화를 받는 순간, 어떤 일은 몇 시에 하든 상관없고 어떤 일은 당장 해야 하는 일인지 알 수 있다. 일이 생기면 몇 층에서 일을 시작하여 어떤 동선으로 움직일지 계산이 되고, 새로운 일이 생기면 즉각적으로 동선을 수정할 수 있다. 또한 말턴은 모든 술기에 능하기 때문에, 실패하거나 시간이 지체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인턴을 기다리는 사람은 속이 터지겠지만, 말턴은 철저한 계산 아래 가장 효율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
말턴을 보고 있으면 ‘논어’에서 나이를 논하는 문장들이 떠오른다. 3월 1일의 어리바리 인턴이 빠르게 나이를 먹어서 11월에는 40세에 해당하는 불혹(不惑)이 된다. 인턴 일의 이치를 터득하여 주변의 압박에 혹하지 않는다. 또한 70세에 해당하는 종심(從心)이 된다. 마음 가는 대로 일해도 병원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인턴 초반부터 수없이 반복한 일들로 인하여 몸에 밴 습관은 말턴이 된다고 쉽게 사라지지 않으며, 어느새 각자의 자리에서 물 흐르듯이 일하는 의사가 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