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 곧 무기
보통 노안(老顔: 늙어 보이는 얼굴)은 외모의 콤플렉스인 경우가 많지만, 병원에서 일하는 입장이라면 오히려 이득을 보는 경우가 많다. 의대에는 공부 때문에 젊어서부터 고생한 친구들이 많은데, 그러다 보니 꼭 한 학년에 한 두 명씩 상당히 노쇠한 얼굴을 보유한 친구들이 들어오곤 한다. 그러면 나는 꼭 그 친구들에게 ‘교수님’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곤 했다. 그런데 병원에 들어와서 일하다 보니 내가 노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첫 깨달음은 다른 의대 출신의 인턴들과 친해지는 중에, 자연스레 나이 얘기가 나오면서 찾아왔다. 아무래도 인턴장이다 보니 회식자리에서 이 사람 저 사람 열심히 말을 걸고 다녔는데, 나를 조금 어려워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다른 인턴들 나이를 얼추 알고 있어서 ‘제가 어리니까 말씀 편하게 하세요’ 하면서 내 나이를 말했다. 그랬더니 형 누나 할 거 없이 다들 크게 놀라면서 알았다고 하고는, 말 놓는데 두어 달 정도 걸렸다. 나중에 친해지고 물어보니 처음 봤을 때는 삼십 대 중후반 정도로(당시 실제 나이 27세) 생각했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항상 처음 만나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어리게 보이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가 꽤 있다. 좀 경력이 있는 간호사가 다짜고짜 반말을 해서 기분이 나빴다는 인턴들의 하소연도 많고, 환자나 보호자 역시 젊어 보이는 의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반대의 경험만 있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간호사들도 항상 나에게 깍듯하게 잘해줘서 원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언젠가 내 나이를 알려준 뒤로 이전보다 편하게 대하는 게 느껴졌다. 물론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그 간호사 역시 내 나이를 들으면서 많이 놀라는 모습이었다.
환자의 경우에는 내가 가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위에 딱 자세를 잡고 앉는다. 그리고 보호자는 옆에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서 있다(사실 나는 드레싱을 하려고 했을 뿐이다). 어떤 날에는 환자가 자고 있었는데 보호자가 ‘교수님 오셨어~ 일어나’하는 것까지 들었다. (의대 시절에 지은 죄가 있어서) 딱히 부정은 안 하고 '드레싱 좀 하겠습니다~' 했다.
처음에는 내가 노안이라는 사실에 놀랐지만, 시간이 갈수록 노안의 강력한 힘에 더 놀라게 됐다. 예민한 환자라 조심하라는 경고를 듣고 긴장해서 병실에 들어갔더니 환자가 아주 차분하고 예의를 아는 분이었던 적도 있고, 동의서를 설명할 때도 환자와 보호자의 의심보다는 신뢰를 더 많이 받았다. 반대로 마스크를 쓰고 일하는 마취과 인턴 때는 노안 특별 대우를 받지 못하고 몇몇 간호사가 괜한 시비를 걸기도 하였다(다른 인턴에게는 흔한 일이라고 한다). 병원 인턴의 가장 좋은 외모는 다름 아닌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외모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본의 아니게 외모를 이용해서 일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