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는 이비인후과 인턴으로 근무했다. 이비인후과만의 특별한 인턴 업무가 있는데, 수술 전날 밤, 환자의 털을 정리해주는 것이다. 코 수술 환자는 코털을 잘라주고, 귀와 목 수술 환자는 수술 부위와 같은 쪽의 머리를 밀어줘야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긴 한데, 병원에서는 누가 해도 상관없는 일은 자연스럽게 인턴의 일이 된다. 어떤 병원은 이비인후과 담당 미용사를 고용하여 수술 전 머리 손질을 전문적으로 맡기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털을 잘라주는 일이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털이 남아있으면 수술 시야가 좁아질 수 있고, 소독이 깨끗하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머리를 너무 많이 밀어도 안된다. 이비인후과 수술은 보통 간단한 수술로, 수술 후 며칠 내로 퇴원하여 일상생활을 해야 되기에, 수술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으로 잘라야 한다. 귀 수술을 하고 온 친구의 머리가 오른쪽 절반이 깨끗이 밀려 있으면 얼마나 웃기겠는가. 수술하시는 교수님도 이런 문제에 민감하시기에, 항상 머리를 밀고 나면 사진을 찍어서 레지던트에게 전송하고 확인을 받아야 털 밀기가 끝이 났다.
이런 털 관리 업무에서는 장비가 상당히 중요한데, 아쉽게도 우리 병원은 장비가 상당히 열악했다. 코털 관리를 위해 주어지는 것은 오직 작은 미용 가위 한 개였다. 끝이 짧고 약간 휘어져 있어서 코털을 자르기에 적합하긴 했다. 머리털 관리를 위한 장비는 성능이 낮은 의료용 전동 면도기(a.k.a 바리깡) 하나와 파란색 일회용 면도기 다수, 그리고 면도 크림이 아닌 비눗물이 주어졌다.
털 관리 과정 자체는 단순 노동이다. 코털은 가위로 아주 짧게 자르면 되고(가위는 한 사람 끝날 때마다 알코올 솜으로 닦는다), 머리는 정해진 기준대로 자르면 된다. 기준이 귀 위로 몇 cm, 귀 뒤로 몇 cm 이런 식으로 정해져 있어서 실제로 환자 귀에 자를 대고 머리를 민다. 아주 반질반질하게 밀어야 해서 은근히 시간이 걸린다.
초반에는 장비를 다루는 게 어색해서 환자에게 몇 번 상처를 입혔다. 코털을 열심히 자르고 가위를 꺼냈더니 가위 날에 피가 묻어 나온 적도 있고, 환자 두피에 상처를 3개나 만들어서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연고를 바르라고 처방해 준 적도 있다. 물론 점점 발전하여 이비인후과 근무가 끝날 때에는 미용사에 필적하는 면도 실력을 갖게 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외래에서 교수님에게 머리를 밀어야 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입원 당일 아침에 삭발을 하고 온 젊은 남자 환자였다. 환자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꾹 참고, 머리가 반질반질한지 손으로 슥슥 확인했다. 아쉽게도 약간 까칠하게 남아있어서 비누칠을 하고 면도기로 좀 더 완벽하게 밀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