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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호 Mar 23. 2020

일 잘하는 인턴

쉽지만은 않은 길

병원 일이라는 게 사실 ‘잘한다’라는 개념은 없다. 그냥 ‘당연한 일을 했다’ 아니면 ‘못했다’ 둘 중 하나다. 사람은 원래 살아있는 게 당연한 상태이기 때문에, 죽을 사람 살리는 건 당연한 거고 그러다 죽으면 다 의사가 잘못한 거다. 그래도 의사들 사이에서는 누가 일을 잘한다 못한다 평가가 엄연히 존재하고 모든 인턴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나도 아무래도 인정받고 싶어서 인턴 시작 직전에 이제 인턴을 마치는 친구들과 술 한잔하면서 열심히 도움말을 물어보았다. 결론은 두 가지였다. ‘우선순위를 잘 파악해라’ 그리고 ‘존재감 없는 인턴이 되어라’. 그리고 인턴을 마치면서 내가 추가한 도움말 하나는 ‘동선을 줄여라’이다. 셋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감 없는 인턴이 되는 것이다. 물론 가장 어렵다.


우선순위를 잘 파악한다는 것은 경험이 많이 쌓였다는 것이다. 인턴이 일을 해야 레지던트가 다음 업무를 할 수 있는 경우, 당장 환자에게 어떤 조치가 필요한 경우 등 인턴이 바로 달려가야 되는 일들이 있다. 하지만 잘 모르면 전화를 받아도 ‘나중에 다른 거 생기면 같이 해야지’ 하다가, 레지던트한테 왜 아직 안했냐고 전화가 온다. 그렇게 몇 번 혼나다 보면 자연스레 우선순위가 생긴다. 일이 잔뜩 쌓여 있어도 급한 일 생기면 다 놓고 바로 달려가는 인턴, 반대로 안 급한 일들은 모아뒀다가 한 번에 처리하면서 효율적으로 일하는 인턴이 잘하는 인턴이다.


동선은 줄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최소 12시간, 최대 36시간 연속 근무에서 체력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동선을 줄여야 휴식 시간이 확보가 되고, 끝까지 실수 없이 일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동선을 줄일 수 있을까? 앞에서 말했지만 급하지 않은 일은 모아서 처리하면 동선을 미리 정하고 움직일 수 있어서 좋다. 더 중요한 것은 병원 모든 시설의 위치를 파악하고, 비밀 통로와 지름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병원마다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높은 교수님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곳이나 보조원들이 엉뚱한 데서 튀어나오는 지점에는 달달한 지름길이 있을 확률이 높다.


존재감 없는 인턴이란 무엇일까? 일 시키는 레지던트의 마음을 이해하면 된다. 레지던트가 되면 내 아래 인턴이 누군지는 관심이 없고, 그냥 시킨 일이 되어 있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안 되어 있다면 갑자기 인턴이 누군지 궁금해져서 기록을 뒤져보게 된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분 단위로 타임라인이 다 기록이 되어서 누가 일을 안 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거기서 발견된 인턴은 존재감이 생겨버린다.


존재감 없는 인턴은 결국 찾을 일이 없는 인턴이다. 시키기도 전에 일이 다 되어 있고, 부르기도 전에 이미 오고 있으면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 얼마나 편할까? 여기에 더해서 상급자의 확인이 필요한 부분은 무리하지 않고 먼저 연락해서 확인받는다면? 완벽하다. 무(無) 존재감의 극에 달하면 결국 좋은 쪽으로 존재감이 커진다. 레지던트, 간호사 사이에서 일 잘하는 걸로 유명해지고 자기 과로 오라고 유혹하는 레지던트도 생기게 된다.  

 

일 잘하는 인턴은 평가자가 누군지에 따라서 약간 달라진다. 같은 인턴 사이에서는 업무 능력 위주로 평가가 되고 나는 인턴 사이에서 인정받는 인턴이 가장 뛰어난 인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레지던트 입장에서는 업무 능력이 기준 이상이라면 부수적인 요소로 평가가 들어간다. 귀찮은 일을 대신하도록 시켜도 군말 없이 해주는지, 성격이나 취미가 본인이랑 잘 맞는지 등 결국 내년에 자기 밑으로 들어왔을 때 일 시키기 좋은 인턴에 좋은 평가가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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