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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차 Feb 09. 2023

사랑하는 나의 신사

승기씨에게

 아빠를 생각하면 내 마음 속 밥상에는 신선한 재료로 요리한 건강한 아침 식사가 가득 차려진다. 견과류가 듬뿍 들어간 홈메이드 요거트와 양념을 넣어 딱 먹기 좋게 준비된 낫또, 넓은 접시에 풍성히 채워진 아삭한 제철 야채와 크고 잘익은 과일, 따끈하게 삶은 고구마, 식도염이 있다고 엄살부린 다음날엔 익힌 양배추까지. 요리를 하며 생기는 비닐이나 껍질 들은 어느새 깔끔히 치워진 채, 색색깔로 맞춘 포크와 나이프를 이쁘게 내려 놓은 후에야 “내려와서 밥먹~자” 하며 나를 일어나게 하는 언제나 내 편, 나를 위해 준비된 신사. 그게 우리 아빠, 승기씨다.

 출산을 앞두고 육아 정보를 찾다가 기혼 여성이 모이는 인터넷 까페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엄마의 음식 솜씨, 성품, 지성, 사랑의 표현 방식 등 모든 것이 완전해 엄마를 신격화하며 사는 남편 옆에서 스스로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아내의 넋두리를 읽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그 남편의 모습을 닮아있었는데  내 경우 그 이상형은 바로 승기씨얐다.

 승기씨는 뜨겁고도 보수적인 분지, 대구 한복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유학 갔다가 다른 여인을 만나 돌아오지 않았고, 그의 어머니는 기술을 익혀 미장원에서 일하며 그의 누나와 그를 키웠다. 어릴 때엔 조부모와 함께 생활하였는데 그의 조부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경이롭게 지켜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가 어리고 열린 눈으로 발견한 세상에 대한 질문을 마음으로 들어주며 답을 찾아 함께 손잡고 나서는 그런 사람, 격의 없이 어린이와 놀이를  즐기는 사람이었다고.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 승기 씨는 조부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고 나는 내 증조부에 대한 묘사를 들으며 바로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승기 씨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그를 키워주지 못한 아버지 대신 그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다른 아버지를 경험했고 30년 후 그 자신 또한 그런 아버지가 되었다.

 세상을 자신의 눈으로 보며 그 시선을 믿고 지켜낼 줄 알았던 그는 글과 그림, 음악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가 자란, 아버지가 없는 분지의 가정에서는 남자로 살아가는 길이 하나 뿐이었는데 입신양명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럴 듯한 직장에 취직하여 노모와 누나에게 든든한 간판이 되는 것이었다.

 선량하고 유순한 그는 서둘러 가장이 되기 위해 공고를 나와 가까운 지역 대학 공대에 입학한다. 중공업과 첨단기술 분야의 인력에 대한 수요가 넘치던 시절, 기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쌓고 입사하기까지 숨돌릴 틈 없는 20대. 그는 틈틈이 통기타를 익히고 과내 합창 동아리에서 성악을 배우며 생활과 삶의 줄타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생은 끊임없이 무엇 하나 놓지 않으려 애써온 따뜻한 투쟁이었다.

 아내 옆의 승기 씨를 떠올려 본다. 아내는 자그마한 몸집에 깐깐함이 보통이 아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깐깐해 음식, 가족의 이부자리와 의복, 집안 가꾸기 등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으며 끝내는 그 깐깐함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완패하여 그에게 짜증을 부려댄다. 키가 훤칠하고 잘 생긴 그는 귀여운 아내에게 져주는 것만이 승리로 가는 길임을 일찍이 터득했다. 덕분에 복잡한 기계를 설계하고 다루는 일에서 은퇴하고 드디어 삼식이가 된 후에도 아내가 차린 건강하고 따뜻한 음식을 맘편히 얻어 먹는다.

 은퇴 후 승기 씨는 마을 체력증진센터에서 홀로 헬스를 하며 아침을 열고 기타레슨, 피아노 연주, 독서와 합창 연습, 아내와의 산책 후 영어 일기 쓰기까지 알차기 이를 데 없는 하루를 보낸 스스로를 칭찬하며 잠든다. 딸네 가족이 놀러오면 헬스 후 아이들과 놀이가 하루를 채우지만 저녁 식사가 끝나면 어김없이 악기 연주, 영어 일기 쓰기를 하러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그 시간의 그는 혼자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처럼 성스럽고 묵묵해지는데 그 아우라가 신비로워, 개구진 손녀들의 방해 공작은 김이 빠져 버리고 머쓱하게 엄마 품을 찾아가게 한다.

 지난 설연휴에 나는 친정에 머물다 엄마로부터 그의 작은 꿈하나를 전해 들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 불안정한 국제 정세를 걱정하던 그가 말했다고.

 “우리 나라에 전쟁이 나면 나는 참전할거야. 젊은 사람들은 살아야지.”

엄마의 목소리로 전해 들은 것 뿐인데도 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군복을 갖춰입고 반듯한 자세로 서서 중년미를 뽐내는 그의 자태. 훈련과 전쟁에 대한 세부사항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 우아한 글씨로 꼼꼼히 메모하며 머무는 곳과 무기상태를 수시로 살피고 주변을 정비하는 그의 성실함. 전시에 흔들리고 아파하는 군인들의 몸과 마음을 살피고 들어주며 용기를 북돋는 그의 몸태와 말씨. 누구보다 우렁차고 아름답게 군가를, 때론 연가나 자장가를 부를 그의 목소리. 그리고 너무나 두려운 위기의 순간에 자신보다 젊은 군인들을 살리며 ‘나는 행복하고 좋은 삶을 살았다’ 고 가슴으로 가족에게 전할 그 마음을.

엄마의 말로 내게 들어와 머리와 가슴을 채운 승기 씨의 작은 꿈은 나를 행복하고 자랑스럽고 또한, 슬프게 한다. 나의 멋진 신사가 몸을 바쳐 지켜낼 이 나라에 자격 있는 사람들만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한동안 분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승기씨의 꿈은 자신의 품위와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니, 저린 맘을 내려 놓고 이제는 그저 가득 행복하려 해본다. 온 맘으로 생을 사랑한 그가 나를 키웠으니 나 또한 용기있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어 보겠다고. 자주 실수하고 실패할 아름다운 꿈을 매일 다시 꾸게 해줄 내 안에 살아있는 남승기 씨.

그의 목소리를 가까이 들을 수 있는 행운의 시간을 놓치지 않고 많이 묻고 이야기 나누며 그를 마음에 담고 더욱 기꺼이 함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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