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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차 Feb 16. 2023

시간 항아리

인이에게

첫 아이 인이를 임신했을 때, 한 직장 선배가 입덧은 없는 지 물어오며 ‘그런 건 엄마를 닮는다’고 하였다. 나는 입덧 말고도 많은 것이 궁금해졌다. 나처럼 임신을 했던 엄마의 이야기가.

“엄마는 너를 갖고 하얀 눈에 빨간 꽃잎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어. 그래서 백설공주처럼 피부가 하얀 여자아이가 태어날 줄 알았지. 이왕이면 이목구비도 예뻤으면 해서 산부인과에서 받은 달력 속 미모의 아기들 사진을 수시로 보았어. 딸이라는 소식을 듣고 너무 행복했는데 낳아보니 피부는 까무잡잡했어. 간호사 말이 엉덩이 색이 요렇게 까만 아기는 처음 봤대. 문득 옆에서 손잡아 주는 너희 아빠를 보니 피부가 시커먼거 있지?“

엄마의 임신사를 물었을 때 엄마는 태몽과 함께 나의 외모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이야기 했다. 그 후 나의 임신 기간은 엄마가 얘기해 준적 없는 입덧과 소화불량, 자주 느끼는 더위와 그로 인한 불면, 그리고 출산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채워졌다.

  출산 후의 감격도 잠시, 마침내 탄생한 인이는 내 시간을 소비하며 자랐다. 밑빠진 독처럼 새어나가며 쪼들리는 시간, 대출도 받을 수 없는 시간 앞에서 나는 무력하고 답답했다. 깐깐한 엄마를 닮아 ‘계획을 수행하는 삶’을 끌어온 나에게 육아는 허물어져 버리는 모래성을 쌓고 또 쌓으며 파도와 씨름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빨래 개는 걸 돕는다며 곁에 앉아 사부작대던 인이가 말했다.

“엄마, 나랑 같이 하니까 일이 놀이 같지요?”

어느새 내 곁에 앉아 함께 모래성을 쌓고 있는 너. 파도가 오면 까르르 웃다가 너무 가까이 올까봐 혹은 너무 멀리서 사라져버릴까 조바심을 내며 바다의 소리와 몸짓을 쫓는 너. 내 시간으로 너를 키우는 줄만 알았는데 어느샌가 너의 시간이 내 곁에 다가와 있다.

 “엄마, 만약에 나쁜 사람이 나를 잡아가면 어떻게 할 거예요?”,  “엄마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에요?”

엄마의 보호와 사랑을 갈구하는 그녀 앞에서 나는 그저 엄마가 되어 말한다. 나쁜 사람의 목덜미를 잡은 다음 주먹으로 머리를 꽁꽁 때려 그 사람이 엉엉 울면서 빌게 한 후에 인이를 꼭 안고 데려 올거라고, 그리고 내가 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불허하는 나,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은 잠시 등을 돌려 앉는다.

  엄마의 맘을 묻는 딸에게 나는 우리 엄마처럼, 내가 키운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새어나간 줄로만 알았던 나의 시간과 나도 모르는 사이 함께 부어 준 너의 시간이 잘 익어 오랜 태몽이 되면 너의 항아리에 그 이야기들을 가득 옮겨 담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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