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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차 Jul 10. 2023

어떤 사람

사는 사람

 학교에 다녀온 인이는 껍데기를 훌훌 벗고 내복차림이 되어 다용도실 문을 연다. 분리수거를 위해 모아둔 크고 작은 상자, 과일이나 채소를 담았던 플라스틱 용기, 음료수 뚜껑 따위를 만지작거리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양손 가득 보물을 손에 넣은 그녀. 서랍 속에서 잠자던 도구들을 책상 위에 늘어놓는가 싶더니 곧 뭔가를 자르고 붙이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온다. 

 

 퇴근 후, 집안을 정리하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시간이 마무리 될때 쯤 다가오는 그녀의 자랑스런 얼굴.

“엄마, 나 다 만들었어요!“ 인이는 만드는 사람이다.


 남편에게 이직 기회가 생겨, 제주에 이주한 우리 가족은 매일 동네 마트에서 파는 싱싱한 회를 먹으며 바닷가에 사는 특별한 즐거움을 누렸다. 아이들은 네 살, 여섯 살. 날생선을 먹기엔 아직 어리다 싶어 조심스런 맘에 아이들 음식을 따로 준비하던 어느날 온이가 우리가 먹는 음식에 관심을 보였다.

 "맛볼래?" 하고 내민 황돔회 한 점을 주저 없이 입에 넣고는 눈이 동그래져, 

 "이거 이름이 뭐예요?" 하던 그 날, 그녀는 회 애호가가 되었다. 그 후 철따라 달라지는 생선회의 종류를 마다않고 즐기다, 광어 지느러미를 맛보곤,

 "음, 이거 맛있는 거네!" 깨달음을 얻은 그녀.

 '노란색' 파프리카 채, 부추전의 '바삭이' 부분, 굴비의 '알'과 함께 '생선회 지느러미'를 마음 속 미식의 전당에 올려 놓은 그녀는 그 후에도 새로운 음식을 맛보고, 묻고, 마음에 담고, 요구하며 하루 세끼를 보낸다. 잠들기 전 팔베개를 한 내 귀에 속삭이는 말, "엄마, 내일 아침에 크림스프 해줘요. 그리고 유치원 갔다와서 인절미랑 분홍색 꿀떡 두개 다 먹을래요."


"여보, 온이는 먹는 사람인 거 같아." 아이의 미식 계획을 전하는 내 말을 들은 남편의 질투 섞인 한마디. "와, 좋겠다!" 그는 내가 해 준 음식을 가리거나 남기지 않고 먹는다. 그에게 내 음식은 생존이나 감각의 만족을 위한 수단이라기 보다는 가정에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사랑이다.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이면 감칠맛이 적거나 모양이 형편없어도 맛있게 먹는다. 기대가 적고 감사가 큰 그의 식습관 덕에 식사 담당인 내 맘도 부담보다 기쁨이 크다.


 그런 그는 종종 식사 시간에 다른 세상으로 떠난다. 사람의 마음을 더 살펴 대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있거나 근사하게 해내고 싶은 과업이 있는 날이다. 쉴새 없이 종알대는 아이들이, "아빠!" 하고 여러 번 부르면, 이야기를 모두 놓쳐 멋쩍은 표정으로 먼 곳에서 돌아온다. 설거지를 하기 전 그릇을 정리하다가도 눈빛은 생각에 잠겨있고, 남은 음식을 냉장고에 넣고 돌아오다 갑자기 거실로 가 뒷짐을 지고 서성인다.

"여보... 무슨 사람인지 알겠다." 묘하게 웃는 나를 보는 그. 호기심 뒤로 불안함이 묻은 표정이다.

"여보 그거야, 생각하는 사람." 가장 골치 아픈 패를 손에 쥔 채로 부인하지 못하는 슬픈 미소.

"나도 그냥 먹는 사람 하고 싶다...." 탈락이야, 먹다 말고 생각하는 사람.


 그동안 스스로를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온 나는 지난해 처음 북페어에 참여했다. '파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보는 일이 어색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방문해 준 사람들은 나를 "쓰고 엮는 사람"으로 보아 주었다. 내 안의 '창작하는 사람'을 발견해 주는 시선들, 맑은 응원이 되어 부담없이 기운을 북돋는다.

 

 우리는 호모루덴스, 놀이하며 살아간다. 놀이하며 빛나는 삶을 누리고 사랑을 한다. 해내야 하는 것들이 늘어가는 세상 속에서 놀이의 자리가 줄어들때는, 한 때 좀 놀았던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이나 노래를 들여다보는 일이 힘이 되어 준다.


"우리 창작하는 사람으로 살아요."

쓰고 엮는 일이 그저 꿈이었던 시절, 읽고 연주하는 사람인 그녀가 내 마음 곁에 있어주었다. 나누는 대화 속에 영감이 가득해 곱게 싸서 담아둔 맘이 넘친 어느날, 흘러 내려 잊히기엔 아까워 늘어놓다 나의 이야기가, 글이 되었음을 기억한다. 그녀와 같은 동네에서 살며 가까이 지낸 시간은 짧고, 전화로, 메세지로 나눈 이야기들은 늘 일상의 분주함 속에 조각나기 일쑤였다.


 그 속에서도 서로의 '창작하는 사람'을 믿고 말하고 듣고 응원한 우리.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루를 잘 살아내기 위해 함께 쓰고 연주하고 놀이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어떤 사람이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삶이 버겁고 고단한 순간이면 잠시 손에 쥔 것을 놓고 내 안의 '놀이하는 사람'을 들여다 봐야 한다. 나만이 할 수 있는 내 몫의 창작, 고유함을 나눌 이웃이 있다면 더욱 좋겠다.


그렇게 잠시의 행운을 누리고, 언젠가 다시 삶에 지칠 때 꺼내어 열어 볼 힘을 만들며,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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