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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글쓰기
유산 후 감정 변화
#2
by
임하나
Oct 24. 2023
1차 정밀초음파 날이었다.
- 목투명대가 두꺼워요. 3.9mm 자세한 건 진료실에 가서 들으세요.
우리는 진료실로 갔다. 그때만 해도 목투명대가 두껍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 융모막검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 병원에서는 하지 않으니까 ○○으로 가세요.
‘이렇게 확실하게 말하는 분이었나?’
1년 가까이 나를 봐주셨지만 처음 보는 단호한 모습을 보며 의아했다.
왠지 모르게 싸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융모막검사가 뭔지, 유사산 가능성 때문에 많은 산모가 확진 검사인 융모막검사보다 선별 검사인 니프티를 선호한다는 사실도. 애초에 나에게는 융모막이냐 니프티냐 선택지조차 없었다.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소개받은 병원에 전화를 했다.
임신주차, 목투명대 검사 결과를 말하니 당일 예약을 잡아주었다.
- 시험관 한다고 고생 많이 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됐누
..
내 배에 주사 자국을 본 원장님은 검사를 준비하며 혼잣말을 했다.
말 끝 여운에 서글펐다.
나는 다음날까지도 정신이 없었다.
- ○○입니다.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으셨어요? 다운 확진이에요.
월요일은 되어야 결과가 나온다던 병원은 검사 다음날 바로 연락을 줬다.
간이 결과를 듣고 나서야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일요일에는 담담했고, 비장했다.
괴롭고 죄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어
오랜만에 성당에 가서 기도를 했다.
‘내가 지금 슬픈 건가?’
슬픔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껏 경험했던 슬픔과 달랐으니까.
월요일에는 화가 치솟았다.
나는 활화산처럼 막 화를 냈다.
한참 화를 쏟아내면 서글픔과 씁쓸함이 따라왔다.
왜 나에게는 이런 선택지들만 있는 건지 억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왜 하필 나인 거냐고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할 대상도 없었고 따져봐야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슬프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은 결혼기념일이었다.
나는
명민한 감수성을 지녔음에도, 느껴보지 못 한
감정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내가
슬픔 이상으로 비통하다는 걸 이후에 알게 되었다.
한 달이 지났다.
마음이 공허하다. 가라앉은 느낌이다.
나는 임신 초기와 다른 무기력을 겪고 있다.
방향을 잃었음을 실감할 때도 있고, 후회할 때도 있고, 죄책감이나 분노가
찾아올 때도 있다.
그리움도 있고, 이대로 사라지고 싶을 때도 있고
자꾸 깜빡하고 놓치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이 가엽고 안쓰럽다.
그렇지만
주변
존재들 덕분에, 때로는 내 안에서 의지가 솟구쳐서 기분이 좋을 때도 있다.
스위치를 켜듯
급작스러운 감정 변화가 난감하다.
나는
여행을 왔고, 낯선 길을 달리는데 터널로 들어갔다. 한참을 달려도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터널이 끝날 때까지 달릴 뿐이다.
더위 - 시원함 - 비 - 쌀쌀함 - 단풍 - 바람 - 낙엽
변화무쌍한 계절을 지나며 나는 좌절했고 절망을 겪어 내고 있다.
최선을 다해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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