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낙낙 Nov 12. 2024

선밟으면 OUT

내가 친구들에게 절교당한 이유

어린 시절,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주인공처럼 친구들에게 축출되는 경험을 했다. 그것은 내 인생의 첫 번째 큰 '방출'이었고, 그 시절의 상처는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낙인처럼 새겨져 있다.


그것은 왕따는 아니었지만, 한꺼번에 많은 친구들과의 이별을 겪어야 했기에 어린 마음엔 매우 큰 상처였다. 그나마 다른 친구들이 있어 어울릴 수는 있었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아프다.


그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배려라는 걸 몰라. 그래서 우리는 너와 함께 놀지 않기로 했어.” 그 말이 아직도 내 안에서 메아리친다. 비슷하게 묘하게 멀어지는 기분이 들면, 나는 그 말을 떠올리게 된다.


배려, 배려란 뭘까?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배려에 대해 아주 많이, 계속 고민해왔다. 그게 도대체 뭐길래 우리가 함께한 좋은 순간들을 그렇게 쉽게 헌신짝처럼 던져버릴 수 있었을까? 정말 우리가 좋았던 것들을 넘어서야만 했던 걸까? 나는 왜 그걸 못한 걸까? 나도 사실 배려하고 싶었는데.


억울하기도 했다. 나는 나름대로 많은 배려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결국 소용없었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 말이다. 나를 죽여가면서까지 상대를 위해 애쓴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건 정말 배려가 아니었을까?


과거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낙낙아, 선을 잘 넘는 에너지가 강해서 모를 수도 있어. 그리고 네가 하는 배려는 받으면 좋긴 하지만, 지나칠 때가 있어. 그래서 사람들은 '나도 이렇게 해야 하나?' 혹은 '혹시 다른 의도가 있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 다 사람마다 다르고, 세상의 상식이란 걸 고려할 필요가 있어.” 그렇게 설명해줬다면 어린 나는 "아~" 하고 안심했을 것이다.


망한 건 망한 거고, 그 이유를 알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가끔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앗, 또 선을 밟았구나” 하고 스쳐 지나가는 쎄한 느낌. 사람들의 반응이 어색해질 때, 나는 내 마음속에서 깊은 공포를 느낀다. 그 순간들은 나만 느끼는 나만의 공포다. 그때를 알았다면, 그 선을 넘지 않았을 텐데. 나는 아직도 이 게임의 룰을 잘 모르는 기분이다.


다행히 약을 먹으면서 그 쎄한 순간들을 더 빨리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 순간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솔직하게 물어볼 용기를 내어, 스스로의 단점을 재빨리 인정하고 물어보면 인생의 미스터리가 하나씩 풀리는 것 같다.


살아가며 경험이 쌓이다 보니 대처가 전보다 능숙해졌다. 빅데이터처럼 작은 힌트들이 모여, 선을 정확히 보지 못하더라도 그 ‘아우라’라도 느끼게 되었다. 약 덕분에 센서가 더 예민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상처를 들여다보면 아직도 피가 새어나오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의 이전글 ADHD 진단을 받기 위해 병원을 바꿨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