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친구들에게 절교당한 이유
어린 시절,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주인공처럼 친구들에게 축출되는 경험을 했다. 그것은 내 인생의 첫 번째 큰 '방출'이었고, 그 시절의 상처는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낙인처럼 새겨져 있다.
그것은 왕따는 아니었지만, 한꺼번에 많은 친구들과의 이별을 겪어야 했기에 어린 마음엔 매우 큰 상처였다. 그나마 다른 친구들이 있어 어울릴 수는 있었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아프다.
그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배려라는 걸 몰라. 그래서 우리는 너와 함께 놀지 않기로 했어.” 그 말이 아직도 내 안에서 메아리친다. 비슷하게 묘하게 멀어지는 기분이 들면, 나는 그 말을 떠올리게 된다.
배려, 배려란 뭘까?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배려에 대해 아주 많이, 계속 고민해왔다. 그게 도대체 뭐길래 우리가 함께한 좋은 순간들을 그렇게 쉽게 헌신짝처럼 던져버릴 수 있었을까? 정말 우리가 좋았던 것들을 넘어서야만 했던 걸까? 나는 왜 그걸 못한 걸까? 나도 사실 배려하고 싶었는데.
억울하기도 했다. 나는 나름대로 많은 배려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결국 소용없었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 말이다. 나를 죽여가면서까지 상대를 위해 애쓴 부분들이 있었는데, 그건 정말 배려가 아니었을까?
과거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낙낙아, 선을 잘 넘는 에너지가 강해서 모를 수도 있어. 그리고 네가 하는 배려는 받으면 좋긴 하지만, 지나칠 때가 있어. 그래서 사람들은 '나도 이렇게 해야 하나?' 혹은 '혹시 다른 의도가 있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 다 사람마다 다르고, 세상의 상식이란 걸 고려할 필요가 있어.” 그렇게 설명해줬다면 어린 나는 "아~" 하고 안심했을 것이다.
망한 건 망한 거고, 그 이유를 알면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가끔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앗, 또 선을 밟았구나” 하고 스쳐 지나가는 쎄한 느낌. 사람들의 반응이 어색해질 때, 나는 내 마음속에서 깊은 공포를 느낀다. 그 순간들은 나만 느끼는 나만의 공포다. 그때를 알았다면, 그 선을 넘지 않았을 텐데. 나는 아직도 이 게임의 룰을 잘 모르는 기분이다.
다행히 약을 먹으면서 그 쎄한 순간들을 더 빨리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 순간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솔직하게 물어볼 용기를 내어, 스스로의 단점을 재빨리 인정하고 물어보면 인생의 미스터리가 하나씩 풀리는 것 같다.
살아가며 경험이 쌓이다 보니 대처가 전보다 능숙해졌다. 빅데이터처럼 작은 힌트들이 모여, 선을 정확히 보지 못하더라도 그 ‘아우라’라도 느끼게 되었다. 약 덕분에 센서가 더 예민해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상처를 들여다보면 아직도 피가 새어나오는 느낌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