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의 심장

영화 '철의 꿈'

by wanderer

[첫인상]

막걸리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에 갇혀 좁은 벽에 부딪혀 공명하는 소리를 마주하던 때가 있었다. 찰나에서 영겁으로 이어지는 그 열네 시간의 기억은 추억처럼 넋두리하고, 기록하지 않은 채로 머문다. 그때의 그 감정. 세상의 가장 가벼운 찌꺼기가 된 기분으로 부유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 영화의 첫인상, 신을 묻는 이야기에서 나는 묵혀두었던 오랜 기억을 떠올렸다. 그 시간들은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가장 거대한 크기의 시간이었다. 기억은 공간의 감각을 잊게 만든다. 나라는 사람의 형태를 잊어가는 만큼 나는 거대해질 수 있었다. 시간들은 한없이 가벼웠다. 똑같은 색깔의 밤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맑아진 세상이 눈 앞에 존재했다. 육체와 영혼의 결속이 끊어지는 순간에 신이 들락날락하는 느낌.

그런 옛 추억의 연장선에 이 영상물이 닿아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래와 화물선]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가 새겨져 있다. 신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그들은 신으로 이미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땅에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가 있기 전에 있던 신은 고래였을지도 모른다.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의 생명체는 그 자체로 경외의 대상이 된다. 교과서에서는 언제나 바위에 새겨져 있는 그림을 풍요의 기원으로 읽어내지만, 이곳의 이 존재들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에이허브 선장도 모비 딕을 잡지 못했는데 옛사람들이 과연 고래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까? 만약 그 생각을 못했다면 고래가 새겨진 그림은 고래를 잡아먹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고래 신'을 기리는 형태로 새겨두었다는 말이 더 설득력 있지 않나.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형태로 이해가 된다는 점이 무척이나 혼란스럽다. 설명을 위한 표현에 한계가 생긴다. 그저 좀 더 여유롭게 상황을 지켜보자는 말만 떠오른다. 잠자던 시냅스가 반짝하고 생각을 잇는 지점은 고래와 화물선이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이다. 고래와 화물선을 잇는 불명확한 공통점은 기묘한 기시감으로 이어진다. 고래의 모습을 보면서 대형 화물선의 모습을 떠올리고, 화물선이 건조되는 모습을 보면서 고래의 부분들을 생각한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두 대상들을 역사의 틀 안에서 엮어내는 것은 오롯이 감독의 역량이다. 멍하니 화물선이 건조되는 과정을 따라가며 고래의 장기는 어떻게 생겼을까 생각한다. 고래의 심장은, 힘줄은, 등뼈와 갈비뼈는 어떤 모양으로 생겼을까? 열 속에서 부화하는 화물선의 몸을 닮아있을까?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며, 한국 사람들은 신을 만드는 일을 했다. 거신, 철 고래를 만들어 다시금 그를 바다로 떠나보냈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의 힘으로, 셀 수 없는 온도를 견뎌내고 신은 그렇게 생겨났다. 언젠가 신이었을 존재를 잡아먹고, 인간은 다시금 신을 세웠다.


[신을 부르는 노래]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신을 그려내지는 못한다. 인간이 상상하는 신은 언제나 인간의 머릿속을 넘어서지 못한다. 아무리 괴기스러운 모양이더라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신은 형상을 갖지 못한다. 언어가 설명을 포기한 부분에서, 그림이 설명을 대신한다. 열 마디 말이 풀어낼 수 없는 설명을 하나의 그림이 보여준다. 보여주고 되묻는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른 소리를 할 수도 있고, 하나같이 같은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설명이 충분하지 않으면 사람은 상상한다. 내가 듣지 못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 이야기 말고 내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무엇인지 상상한다. 우리는 설명이 적으면 불친절하다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언어에 한정되는 말이다. 느낀 것을 상세하게 관찰하는 삶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자신에게 맞지 않는 그 이야기들을 '불친절하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불친절한 설명이 불충분한 이야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머나먼 미래의 후손들이 한글을 쓰거나 읽을 수 없게 되어도 이 기록은 오역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신'이라는 개념은 전달될 테니 말이다. 단지 지금의 형태와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런 위치에 도달해있는 '무언가'는 지금의 지위를 누리고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지금과 같은 위치와 대상은 아닐지라도 이해가 어렵지는 않다. 말과 글은 변해도 아이디어는 변하지 않으니까. 신을 부르는 노래는 대대로 이어질 것이다. 구태여 그의 이름을 부르짖지 않아도 그는 영상 속에 살아 숨 쉬니까.

집단의 기억은 새로운 형태의 언어를 필요로 한다. 시간에 지지 않을 언어를 찾아내어 기록해야 했다. 부서진 이미지 조각들의 접합은 집단 기억의 기록으로 남았다. 역사를 사유하려면 이미지를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교과서 속 인화된 사진의 사연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 사람들의 사연을 상상하려면 감정으로 마주해야 한다. 이해하지 말고 느껴야만 아는 내용들이다.


강력한 믿음의 대상이 사라진 지금, 사람들의 마음속은 텅 비어있다. 사회를 진보하게 만든다는 믿음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대상이 있어야 명확해진다. 한국의 현대사에 '철'이 있었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물질로만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 더 좋은 삶을 살아가게 된단 말인가? 무엇을 갖고 무엇을 꿈꾸며 살아가는가? 누구 하나 명확한 답을 들고 있지 못하니, 우리는 꿈을 꾼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철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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