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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제 Oct 05. 2022

지니 말고 순이

순이야 노래 틀어줘

"이제 인터넷 다 돼!"


엄마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그래? 축하해."


반면에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일테면, 이제 때가 되었다는 마음으로 출가하는 승려의 마음으로 묵묵히 짐을 쌌을 뿐이다.


내가 시골에 내려가지 않는 최후의 방패막이 바로 '인터넷 불가'였기 때문에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내 변명의 구실을 모를 리가 없는 엄마가 인터넷 연결을 미루고 있던 건 아니었다. 몇 번 상담을 했지만 업체에서는 근처에 나무가 너무 커서 인터넷 선을 연결할 수 없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배에서도 와이파이가 터지는 세상인데 산이라고 인터넷이 안 된다니."

"그러게 말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나라에서!"


나는 괜히 큰 소리를 쳤다.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데 이것 참 아쉽게 되었다는 듯이. 무너뜨릴 수 없을 것만 같은 높은 벽이 나인양 당당해진 채로. 하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끈질기게 발품을 팔아 겨우겨우 기사님 한 분을 통해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었다.


"설치하기 귀찮아서 그래요, 그 사람들은."


인터넷을 연결해주고 돌아가던 기사님의 마지막 한 마디는 여느 소년만화의 클라이막스에 등장해 도움을 주고 훌쩍 떠나는 캐릭터들 만큼이나 멋있었다. 내가 기사님의 멋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그러니까 원래 그런 조연들은 오히려 주연보다 인기가 많다, 엄마는 바로 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 얼마든지 있어도 돼."


나는 본 적 없는 기사님의 모습을 그리다 문득 현실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엄마는 수십여 일간 바다에서 싸운 끝에 물고기를 낚아 올리듯 나를 낚아 올리기 위해 강수를 두고 있었다.


뭐 어쩌겠는가.


그게 내 시골살이의 시작이었다.






본격적으로 짐을 싸들고 시골에 내려간 날 밤에 엄마는 신기한 게 있다면서 대뜸 지니야, 를 외쳤다.


"네. 말씀하세요."


그러자 고운 AI 여자의 음성이 작은 기기에서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텔레비전 광고에서나 보던 AI 음성 서비스 기기가 시골집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 집보다 더 최첨단이네, 이제."


엄마는 신이 나서 몇 번이고 지니에게 TV를 켜고 끄거나 음량을 높이고 줄이는 등의 심부름을 시켰다. 이외에도 출퇴근을 할 때마다 지니에게 인사를 하거나 심심할 때 지니에게 말을 걸어댔다. 엄마만 보고 있으면 AI 음성 서비스가 가정당 꼭 필요한 존재처럼 여겨졌다.


지니를 열심히 이용하는 엄마와 달리 할머니는 바뀐 리모컨에도 적응을 제대로 못해서 TV를 켜지 않고 혼자 우두커니 정적 속에 앉아 있는 일이 잦았다.


내가 시골에 오기 위해 인터넷을 설치하긴 했지만 집의 본래 주인은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가 불편함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는 미안했다. 엄마가 지니를 쓰는 걸 보면 신이 나다가도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내려놓는 할머니를 보면 속이 답답했다.


"할머니가 말이야."


아침 7시가 겨우 되어가는 시간이었고 나는 아직 졸음이 가득 묻은 얼굴로 밥만 대충 얻어먹기 위해 부엌으로 건너온 참이었다. 엄마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얼굴로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응."


할머니는 조금은 머쓱한 얼굴로 허허, 하고 웃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수줍고 자그마한 웃음이 졸음기 묻은 내 얼굴로 스르르 옮아 오는 듯했다.


"자꾸 순이를 찾는다."

"순이? 순이가 누군데?"

"지니!"


엄마는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나는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로 엄마와 할머니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빵 터지고 말았다. 할머니는 나름대로 엄마가 지니에게 시키는 걸 따라 한다고 한 것이 그만 순이를 찾은 것이다. 순이라고 몇 번을 부르고 목소리를 높여도 대답을 하지 않는 야속한 지니를 보며 엄마가 웃음을 터뜨리는 참에 내가 막 방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할머니한테는 순이가 더 어울리긴 하다. 이름 못 바꾸나?"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엄마는 계속 웃고, 할머니는 여전히 수줍게 웃으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종종 지니를 향해 순이를 부르곤 했다. 물론, 지니는 대답하지 않는다. 나 역시 대답을 바라지 않는다. 그냥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순이야, 를 뱉는 어떤 사람의 마음이 되어 그 이름을 불러보고 싶은 순간이.


나는 지금도 지니라는 이름을 보면 자동적으로 할머니를 떠올린다. 조금은 다정하고 어쩌면 많이 야속한 순이 역시 함께 떠오른다. 나를 조금은 덜 외로워지게 만드는 이름들이 그렇게 하나씩 더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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