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사람들은 ‘유행’ 내지는 ‘트렌드’라는 말을 좋아한다. ‘힙하다’는 말을 동경한다. 뭐가 유행하면 우르르 몰려다닌다. 마케터나 장사꾼에게는 좋은 표적이다. 그렇게 몰려다니면 ‘흐름’이 형성되고 법칙이 생겨나니까. 자, 이것이 성공의 법칙입니다. 내 말을 따르시오! 기업체나 기관을 위한 글을 쓰면서 트렌드는 강박이 됐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도 공부해야 했고, 내가 좋아하는 것도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다뤄야 했다. 후자 쪽이 더 괴롭다. 그네들은 결국 자신들을 돋보이게 해주길 원한다. 거기서 ‘내 글’ 같은 것은 없다. 백 퍼센트 모조리 다 남의 글이고, 내 양심을 내놓고 쓰는 파렴치한 글들이다. 정치 성향이 달라도 견뎌야 하고, 내 취향이 어떻든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 싫은 티를 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출판대행업은 젊은 층에 인기가 없다. 소위 MZ세대라 불리는 이들에게 적합한 일은 아니다. 자신의 양심을 내놓고, 때로는 자신의 취향까지 팔며 공부하고 정리하고 쓰고 들어야 하니까.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데도 요즘 쓰는 글 대부분이 MZ세대를 타깃으로 한다는 점이다. 전혀 MZ스럽지 않은 업무 방식과 체계를 가진 기관들의 목표 대부분이 ‘젊은 층을 사로잡아라’이다. 홍보 효과가 좋고 그만큼 판매에 영향을 주니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나이가 들면 점차 세계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세계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이 모인 기관에서 세계의 끄트머리를 붙잡기 위해 애쓴다. 뒤처지는 것은 좀 늙는다는 것이고, 늙는다는 것은 곧 죽음과 더 가까워진다는 것이니까. 늙고 싶지 않은 거다.
트렌드에 관심이 없는 나는 이런 연유로 어쩔 수 없이 매번 조사하고 검색하고 공부한다. 그래야 내가 밥벌이를 할 수 있고, 내 통장으로 급여가 들어온다. 급여가 들어와야 생활비를 내면서, 가끔은 여유도 부릴 수 있다.
그렇다면 트렌드에 집착하는 이 세계는 과연 그에 맞게 흘러가고 있을까. 기관이나 기업들의 업무 처리 방식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진 않다. 젊은 실무진들이 애를 써도 결국 나이 드신 결정권자들을 이길 수는 없다. 그들의 트렌드는 ‘흉내 내기’에 가깝다. 그런 척해야, 젊은 것처럼 보여야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보지.
구멍가게 옆 복개천 공사장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의 전부였던 시절, 뿌연 매연 사이로 보이는 세상을 우리는 가슴 두근거리며 동경했었다. 이제 타협과 길들여짐에 대한 약속을 통행세로 내고 나는 세계의 문을 지나왔다. 그리고 너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문의 저 편, 내 유년의 끝 저편에 남아 있다.
-넥스트, <유년의 끝> 부분
신해철이 쓴 노랫말은 쉽고 강렬하다. 비비 꼬지 않고 직선으로 가슴에 꽂힌다. <유년의 끝> 앞부분을 들을 때면 언제나 영화 <스탠 바이 미>가 떠오른다. 그땐 몰랐는데, 지나가 보니 유년은 내가 가슴 벅차게 사랑했던 유일한 때였다. 수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어느 때도 유년기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좁디좁은 우주 안에서 복작거리며 싸우고 울고 웃었다. 죽기 전 단 한 번의 소원을 빌 수 있다면 초등학교 입학 전 서울 종암동 시절로 돌아가 보는 거다. 24시간 하루만 동네 아이들과 놀 수 있다면, 늦은 저녁 집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호통을 들을 수 있다면, 조부모·부모·고모·삼촌과 함께 저녁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면, 고물 검정색 라디오를 켜 FM 방송에 귀 기울이던 그 늦은 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이제 지나고 없다. 신해철의 노랫말처럼 그 시절 우리는 그 좁디좁은 세계 너머의 넓은 대지를 동경하고 있었다.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서 내가 만난 건 타협과 길들여짐, 굴복과 인내뿐이다. 뒤돌아보니 그 문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앞으로는 갈 수 있어도 뒤로는 갈 수 없는 세계이니까.
애석하게도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은 유행이나 트렌드 따위가 아니다. 두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실체 따윈 없다. 이제 사라져버려 기억마저 희미해진 지난 시간의 조각들만이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어쩌면 난 불행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