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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 May 19. 2024

당신과 대화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

언어는 결국 표현 수단이잖아요

오래전에 놓아버렸던 언어 공부를 최근에 다시 시작했다. 그냥 하면 중간에 다시 놔버릴까 봐 꽤 비싼 비용을 내고 자격증 시험을 목표로 공부하고 있다. 30대 중반에 '가속화하다', '효소', '기소하다' 같은 단어를 중얼거리며 외우고 있다 보면 아차 하는 사이에 현타가 온다. 한국에서도 잘 안 쓰는 효소 같은 단어를 외국어로 말할 일이 있을까? '나 왜 이러고 있지?'부터 시작해서 '내가 이 공부를 왜 다시 시작하려고 했더라'까지 돌아간다.


학원을 다니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유학준비생들 틈바구니에서 왠지 더 뻘쭘할 것 같아 독학을 해보자 했더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겼다. 내가 신청한 시험은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총 4가지 파트로 구성된 총체적 시험인데 특히 '말하기' 파트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1년 정도 살았는데 하다 보면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했지만 언어라는 게 정말 쓰지 않으니 금방 퇴화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탄뎀'이라는 어플을 깔았다. 2인승 자전거를 뜻하는 탄뎀은 내가 공부하고 있는 독일어에 어원이 있다. 2인승 자전거처럼 서로 돕는, 자유로운 언어 교환이라는 좋은 취지로 생긴 어플이지만 이걸 틴더처럼 쓰는 옐로피버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라 나로서는 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이었다. 


내 시험 공부하겠다고 시차가 8시간이나 나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친구를 깨울 수도 없고 한 달도 안 남은 기간 동안 학원을 등록하기도 어려웠다. K팝의 영향인지 탄뎀에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독일어 네이티브들이 즐비했다. 반은 옐로피버겠고 반은 BTS팬이려나? 좋은 언어교환 파트너를 구하기 쉽지 않았는데 신기하게 자신의 프로필을 빼곡한 한국어로 적어놓은 독일인이 있었다. 정치, 철학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독일인스러웠고 인생, 드라마, 음식, 여행에 대한 주제에 관심이 많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중 '심한 개신교와 윤석열은 싫어요'라는 말에 내 흥미 버튼이 눌려 바로 말을 걸어봤다. 


며칠 대화를 나누는데 옐로피버 아님, 한국어에 진심임, 진짜로 보수 정치인을 싫어함이 느껴졌다. K팝 때문에 이제 막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들은 거의 가나다를 배우는 정도인데 이 친구의 한국어 레벨은 내 독일어 수준과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바로 통화를 해보기로 했고 우리의 대화 방식은 나는 독일어로만, 이 친구는 한국어로만 이야기한다는 전제 하에 서로의 발음이나 문법을 교정해 주기로 했다.


약간의 긴장으로 시작해 50분 정도 이어진 통화가 끝나갈 때쯤 내가 느낀 감정은 당황스러움에 가까웠다. 

뭐 때문에 한국어를 공부해요?라는 질문에 '그저 재미있어서'라는 대답에서 아마 1차 충격을 받았고. 그렇게 목적 없이 언어를 공부할 수가 있다고? 시험만을 목적으로 대화를 요청했던 스스로가 민망해 혹시 한국어 능력시험을 준비하냐고 묻자 '시험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라고 했던 것에 2차 충격. 그럼 뭐 하러 현지 시간 새벽 2시에 나와 50분 넘게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걸까 생각이 들 때쯤 3년 간 한국어를 공부했지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또렷한 음성이 나를 적잖이 당황하게 했다.

'이렇게 당신과 대화할 수 있어서 행복해요, 충분히 행복해요.' 


나의 파트너는 진심으로 순수하게 언어를 공부하는 것 자체에 기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었다. 언어를 배우면 당연하게도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지만 이 친구는 정치와 사회 저변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유치원 때부터 외국어를 주입식으로 학습시키며 외국어 학습에 대한 흥미 자체를 잃어버리게 하는 우리나라의 교육환경이 매우 안타깝다고 했다. 

하나의 언어를 만나는 건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일과 같다. 그 순수한 기쁨과 재미를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그저 나를 증명하는 수단으로써 공부하다 보니 방향을 잃었던 것 같다. 언어를 순수하게 배우고자 했을 때의 내 마음은 '목소리'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코미디쇼의 농담에 따라 웃고 싶었고 시위대의 팜플렛에 적힌 반어법을 이해하고 싶었던 게 컸지 자격증에 적힌 레벨과 점수가 아니었는데. 

시험을 목표로 공부하다 보면 살아있는 언어를 배우기 어렵다. 그러니 공부도 재미없어질 수밖에. 

그래도 나는 내일도 '노동조합', '생활하수', '연료를 보급하다' 같은 단어를 열심히 외워볼 거다. 책 제목처럼 언젠간 귀도 트이고 입도 트여서 그 친구와 정치인들이 하는 짓거리 같은걸 함께 욕할 수도 있을지 모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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