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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쓰는 나그네 Feb 02. 2019

바깥은 여름

김애란 소설

바깥이 여름이면 안은 겨울일까?

안과 밖의 대비를 통해 소설의 내용이 유추된다. 7편의 단편소설이 옹골차게 시린 겨울처럼 차갑다. 이별이 아픔이듯 삶도 아픔이다. 우리 스스로도 바깥은 뜨거워 보이지만 실제로 내면은 차갑다. 열을 발산하며 뜨겁게 달궈지는 불덩어리 같지만 얼음덩어리 안고 사는 냉혈안이 숨어 있다.

소설에서 시린 마음을 담고 있는 다양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고 지워진 일상을 찾으려는 부부, 노견 에반의 안락사 비용을 마련하다 현실의 유혹에 넘어가는 소년, 허니문 기간이 지나 신비가 사라진 이수와 도화의 두 마음, 소멸해 가는 언어를 박물관의 틀 안에 가두려는 불편한 현실, 아버지와 대학교수에게 배신의 맛을 본 풍경의 쓸모, 아들의 가리는 손에 숨겨진 씁쓸한 미소, 그리고 남편을 잃고 삶의 이정표를 잃어버린 아내의 여행 등 각각의 이야기에 이별과 상실의 아픔이 묻어 있다.


노찬성과 에반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 마음이 아팠다. 노견 에반은 암이 전이되어 죽음을 앞두었다. 고통의 한계에 굴복해 주인에게 이별을 고한. 그리고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마지막까지 포대 자루에 담긴 에반을 끝끝내 보지 못한 소년의 모습이 나의 모습으로 오버랩되었다. 에반을 통해 잊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연상된다. 나 또한 아버지의 모습을 끝끝내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 아프다. 함께 했던 추억만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사고의 잔상이 오래 남겨질 모습을 담기는 싫었다.



▨ 짧은 단편소설의 느낌을 남긴다.


<건너편>

이수와 도화.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공부하다 만났지만 합격과 불합격은 결국 그들의 길을 다르게 만들었다. 환경과 여건이 달라지면 생각과 말의 어휘들도 달라진다. 허니문 기간을 지나 서로의 신비가 사라지고 일상이 되었을 때 그 차이가 잠재된 내면의 욕망을 들춘다. 비교하려는 욕망이 자리에 들어서면 멈출 수 없다. 서로의 마음에 틈이 생겼다면 붙잡는데 한계가 있다. 서로 갈라서는 길이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침묵의 미래>

소멸해가는 언어를 박물관이라는 공간에 끌어 모았다. 사람의 몸을 소수언어 보호라는 미명 아래 가두어 둔 것이다. 인격은 무시되고 동물원에서 관람되는 동물처럼 자신의 언어를 소리라는 형태로 끄집어내고 있다. 인공의 언어가 아름다울 수 없듯 사람은 자연과 함께 호흡할 때 아름답다.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하지만 어느 누구도 침묵할 뿐이다.


<풍경의 쓸모>

아버지와 대학교수 임용이 서로 대비와 교차된다. 아들의 자리와 대학교수의 자리 어느 곳에도 설 공간이 없다. 아버지의 뒤늦은 외도에 배신당했고, 욕심에 기댄 기대는 결국 학과장의 배신으로 되돌아왔다. 삶은 처연하다 못해 슬퍼다. 많이 배웠던 적게 배웠던 중심에서 멀어지지 않으 한다. 더 많이 배운 지식인들이 중심 욕구가 더 강하겠지만...,

여우의 탈, 늑대의 탈을 쓴 이들이 세상에 즐비하다. 그 탈들을 벗겨낼 힘은 없지만, 제대로 분별할 힘은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더블 폴트'. 이 사람의 인생도 더블폴트이다. 연속된 두 번의 시련이지만, 더 크고 큰 걸음으로 일어서리라 기대한다.


<가리는 손>

주인공 '재희'는 동남아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에서 태어났다. 이 소설은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간다. 다문화가정이며 혼자 아들을 키우는 엄마가 걱정하는 사회적 편견에서 아이가 잘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구석구석 묻어있다. 중심 사건은 폐지 줍는 노인을 실랑이 끝에 때려 숨지게 한 영상의 일부에 재희가 목격자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 자리를 피하는 장면에서 겁이 나서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틀짝'이라고 무심코 내뱉는 말과 생일 케이크 너머 담긴, 웃음 고인 임매를 보며 사고 영상과 오버랩된다. 영상에서 재희의 가리는 손이 비명을 감추기 위함이 아니라 웃음을 감추는 손이었다면...

, 마지막에 배신당한 느낌이다. 사람은 믿으면 안 되나? 씁쓸하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스코틀랜드 에딘버르의 사촌집에 한 달간 유숙했다. 남편을 사고로 잃은 허전함에 쌓여 있었다. 삶의 이정표를 잃고 있는 모습을 스코틀랜드 여행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 현석을 통해 남편을 잠시나마 잊고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어보려 했지 결정적 순간, 피부병이 그들을 하나가 아니라 둘로 분리시켜 놓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큰 슬픔이고 아픔이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혼자가 되었다.

마음에 묻어둔 상처, 잊지 못한 상처는 결국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은 잊는 것으로 정리될 수밖에 없다.

"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잊힌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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