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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 Nov 09. 2018

슬픔을 다스리는 법

  간혹 친구들이 속상하고 슬퍼서 울고싶어할 때가 있다. 지금보다 조금 어리숙할 때는 '야, 울지마, 눈물아까워!' 하고 말았었다. 내 사람을 속상하게 한 사람에겐 정말 눈물 한 방울도 아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하루는 내가 너무 슬펐다. 너무너무 슬퍼서 그냥 그 자리에서 울고 싶었다. 속이 답답하고 목이 저릿할 만큼 차오르는 눈물을 꾹 눌러 참고 있었다.


  나는 비통하게도 회사에서 정해진 시간동안 꼬박꼬박 노동해야하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펑펑 우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참기로 했다. 안간힘을 써서 참았더니 참아졌다. 다행히 일하는 중에 울지 않을 수 있었다. 퇴근도 무사히 했고 집에서 식사도 샤워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다음 날도 그랬다. 슬픔이 소멸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엄청 사소한 추억거리가 하나 떠올랐고 그 추억은 나를 다시 슬프게 했는데 그 때 몰려온 울음 예보는 전보다 큰 소리를 냈다. 내 머릿속에서만 울린 경계알람을 아무도 들었을 리 없지만 나는 그 신호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 때도 나는 회사에 있었다.


  내가 울면 다른 분들은 나를 달래거나 위로해 주며 왜 우냐 묻겠지. 나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린 이유를 말해야 하겠지. 남이 들으면 별 것도 아닌 사소한 이유인데도 그래야할거야. 그러기는 싫어서 또 하는 수 없이 삼켰다.


  그리고 난 병이 났다. 울고싶지 않은 기분인데도 가슴이 답답하고 숨만 쉬어도 체한 것 같았다. 슬프지 않은 데 몸과 마음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흐물거렸다. 너무 괴로워서 골똘히 생각했다. 왜 이럴까, 고작 그 사소한 이유들 때문에 이렇게까지 슬퍼할 내가 아닌데.


  아무리 내 어제와, 엊그제를 샅샅히 뒤져도 이렇다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해답을 찾지 못한 채로 다시 퇴근했고, 어제보다 더 가라앉은 기분으로 밥을 먹고 샤워를 했다. 평소보다 일찍 누워 까만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너무 지친 나를 위해 한숨을 쉬었더니 눈물이 함께 울컥 올라왔다. 울면 조금 나을까 싶어서 다시 한숨을 쉬는데 눈물이 흘러 내리진 않았다. 무언가가 눈물샘을 꽉 막고있는 것 같았다.


  저 너머에 갇힌 울음을 불러내려면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일부러 슬픈 영상을 틀었다. 어떤 영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슬픈 영상'을 검색해서 가장 위에 나온 영상을 재생했다. 아직 본격적인 내용도 시작되기 전에 벌써 눈물은 목구멍까지 찼고, 금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나를 속상하고 슬프게했던 모든 것을 떠올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내어 울었다. 난 그 날 오랜만에 내 울음소리를 들었다.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그칠 만 하면 다시 엉엉 울고, 또 그칠 만 하면 훌쩍이며 울고. 베개가 흥건해지고 휴지 뭉치가 두 주먹 가득 쥐어질 만큼 쌓였을 때 눈물은 그쳤다. 숨을 고르고는 물을 한잔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부은 눈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출근했다. 속이 후련했다.


  무엇이든 흘려보내야만 하는 게 정답이였다. 눈물이 아깝다고, 그런 것 때문에 울지말라고 할 게 아니라 빨리 울고 흘려보내라고 했어야했다. 이젠 우는 사람을 애써 그치게 하려하지 않는다. 눈물을 너무 흘린 사람에겐 물을 가져다 주지 그만 울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울음예찬론자다. 눈물을 찬양한다.


  힘들면 울어야 한다. 뒤에서 홀로 억지로 끄집어내는 한이 있더라도 뱉어내야 한다. 울음은 참는 만큼 결국 독이 되어 모든 걸 삼켜버린다. 무료한 일상과 적당한 힘과 조금 과한 기쁨을 모두 한 자루에 담아 꽁꽁 묶어버리고 모든 불빛을 소등시킨다. 고인 슬픔은 썩어들어 나를 자꾸만 땅속까지 끌어내린다. 그러니까 차라리 슬프다면 모두들 울어버렸으면 좋겠다.


  슬픔을 느낄 때 적당히 눈물흘릴 줄 안다는 건 사랑할 줄 안다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감성이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애처로운 것 처럼 내가 내 울음 소리를 모르는 것은 꽤나 절망적인 일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난 뒤론 슬픈 일이 있을 때면 명분을 만들어내서라도 적당히 울곤 한다.


  우는 건 이제 내가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떠는 것 처럼 내 기분을 쏟아내고 나를 비우는 행위가 되었다. 우는 시간은 내가 글을 쓰는 시간만큼 소중하다. 이제 나는 적어도 슬퍼서 일주일 혹은 한 달을 내가 슬픔 그 자체가 되어 사는 일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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